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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22. 성 가정에서 할 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1-07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22. 성 가정에서 할 일

22. What Families Can Do.

 


  반응을 보여 줄 때다. Gaudium et Spes(기쁨과 희망)에서 역사의 움직임이 너무나 빨라져 모든 이가 이를 따라잡기 어렵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이것은 자유주의 사회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분열과 혼돈 속으로 돌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조심과 조심을 다해 따르지 말지니!


  지도자들이 국가의 권위를 있는 대로 다 파괴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교인답게 되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그와는 반대로 신수권(神授權)에 의한 자연계의 두 사회, 즉 가정과 시민사회에 섭리께서 정하신 대로의 권위를 재건(再建)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 지상 세계에서는 그 영향력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 가장 힘겨운 바람을 타는 곳은 바로 가정이다. 사회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면, 프랑스와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는 그 바람이 가속화되고 있다.


  연이어 적용되는 법률적 수단을 보면 친권의 약화, 손쉬운 이혼, 자녀 출산에 있어서의 책임감 실종, 비정상적인 결혼과 심지어는 동성애 부부, 청소년 동거에 대한 법적인 인정, 실험 결혼, 대가족에 대한 재정적 지원 및 사회적 지원 감소, 기타 등등...과 같이 결국에는 가족 구조가 붕괴되도록 단단히 뭉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의 관심이라는 것은 그저 출생률 저하의 효과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 머지않은 장래에 미래세대가 더 이상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이들의 연금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이에 관한 의문밖에는 없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 결과는 영적인 분야에서 훨씬 더 심각하다.


  가톨릭인이라면 당연히 따라가지 말아야 하고, 시민으로서 필요한 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감당해야 할 무게를 전부 져야 한다. 정치라는 핑계로 가톨릭인들이 무조건 초연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은 자녀 양육을 통해서 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다.


  그 문제에 관해 살펴보면,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권위를 원천적으로 의문시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자녀 교육이 학교, 탁아소 그리고 유치원을 운영하는 국가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부모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서 자녀를 양육하고자 하면, 저들은 자녀의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부모를 비난한다.


  그 같은 관념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사람이란 별도의 개체이고 태어나면서부터 독립적이고 완전히 대등한 동시에 모든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고 주장한 17세기 영국 철학자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아는 한, 이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아이는 자기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모든 것, 신체적, 지적, 교육적, 도덕적, 사회적 자양분을 얻는다. 부모가 자녀의 마음속에서 신뢰를 얻고 있는 교사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부모와 교사 중 어느 한 쪽에서 비롯되거나 아니면 양쪽 모두에서 비롯되던 간에, 젊은 시절에 터득하는 대부분의 학습은 관찰 및 개인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이루기보다는 습득되는 것이다. 지식 중에서 상당 부분은 전달해 주는 사람의 권위에서 비롯된다. 학생은 자기 부모, 선생님과 책을 신뢰하며 그러는 가운데 성장한다.


  이 과정은 신앙, 전통 그리고 관습에 부합하는 종교 지식, 수계범절, 도덕적 훈련에 관하여 훨씬 더 그렇다. 세계적으로 살펴보아도 쉽게 관찰할 수 있듯이, 사람들은 보통 가족의 전통에 따라서 생활한다. 어린 시절에 누리던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려면 심각한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가.


  특히 가족 및 배경에 의한 영향은 천주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천주께서는 당신의 강복이 무엇보다도 먼저 가족에 의해 전달되기를 바라셨다. 가장(家長)에게 자기 가족, 자기 아내 및 자기 자녀에 대해서 그 같은 큰 권위를 부여하신 이유가 그것이다. 아기가 극도로 나약한 상태로 태어나야, 그가 안정되고 확고 불변한 가정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부모의 권위를 손상시키면서까지 자녀의 인성과 양심을 고양(高揚)시키려 해보아야 결국에는 자녀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고, 자신을 키워준 부모에게 반기(叛起)를 들고 멸시하는 쪽으로 가지만,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는 장수(長壽)할 것이라는 약속이 있지 않은가. 성 바오로는 이를 상기시키되, 자식을 격분시키지 말 것과 수계범절로써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버지의 도리라 하셨다.


  입교하거나 개종하기에 앞서 종교의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생길 때를 기다려야 했다면,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인이 거의 다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참된 종교를 믿는다. 그 이유는 그 증거자들을 보니 더할 나위 없이 거룩하고 이타적이며 애덕으로 충만하기에 믿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께서 말했듯이, 신앙이 있어야 이해력도 생기는 법이다.


  부모 역할을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알다시피 대부분의 가톨릭 학교가 세속화되기에 이르렀다. 그 학교에서는 이제 참된 종교를 가르치지도 않고 자연과학도 신앙의 빛에 비추지 않고 있다. 교리문답이 현대주의만을 퍼뜨린다. 현대의 미친 듯이 바쁜 생활양식은 여유 시간도 없게 만들고, 부모 및 자녀는 직업상의 의무에 떠밀려서 결국에는 양육을 도와주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서 떠나고야 만다. 가톨릭인들은 혼란스러워 할 뿐만 아니라 무방비 상태이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꼭 필요한 것, 말하자면 부족한 것을 채워 줄 천주님의 성총을 조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소수이더라도 진정 가톨릭다운 학교가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조금 부담스럽더라도 자녀를 가톨릭 학교에 보내라.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했듯이, 새로운 학교를 개교하라. 교육을 왜곡시키는 학교밖에 없다면 불평과 항의를 표명해야 하며, 교사가 자녀의 신앙을 잃게 만드는 것을 보면 그대로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훌륭하고 심오하며 완벽한 트리덴틴 교리문답을 가족 단위로 읽고 또 읽어라. 그와 함께 훌륭한 사제의 영적 지도를 받는 ‘교리 문답반’을 조직하고, 우리처럼 ‘배교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을 두려워 말라. 게다가 이미 그대들의 자녀를 받아들여 운영하는 단체가 많이 있다.


  현대주의자의 독소를 전염시키는 책은 버려라. 도움말을 구하라. 용기 있는 출판업자들이 나와서 훌륭한 서적 및 현대주의자들이 파괴한 서적을 다시 인쇄하고 있다. 성경이라고 해서 아무거나 사지 말 것이니, 성 가정이라면 반드시 4세기에 성 예로니모에 의해 이루어져서 교회가 성문화(成文化)한 것으로, 라틴어역 원본에 충실한 불가타 성서 번역본이 있어야 한다.


  참된 성서주해(註解)에서 손을 놓지 말 것이며, 이전에 어디서든지 거행되었던 것과 똑같은 참된 미사 와 성사를 지켜라. 지금은 마귀가 교회를 공격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이 그러하니, 지금 우리는 아마도 마귀의 마지막 전쟁 중의 하나인 전면전을 목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귀는 전면에 나서서 공격하고 있으며, 파티마의 성모께서 이르시되 마귀가 언젠가는 교회의 최고위직에까지 침투하리라고 하셨으니, 그리 되리라고 믿어야 한다. 공연히 사사로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 로마의 최고 행정기관에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증거가 있다.


  영적인 처방이 속히 내려져야 한다. 복되신 동정녀께서 요청하신 대로, 기도하고 보속을 행해야 하며 가족 단위로 묵주신공을 드려야 한다. 전쟁 때마다 경험해서 알지만, 사람들은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간신히 함께 기도하기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똑같이 지금 이 순간 폭탄이 떨어지고 있고, 우리는 신앙을 막 잃기 직전이다. 세계의 경제위기나 핵전쟁과 같은, 혹시나 인간이 잘못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하여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재앙에 비해 기도의 힘이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아는가?


  갱신(更新)이 꼭 필요하긴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기대할 것이 못된다고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는 젊은이에게 기대해 봐도 소용없다고 확인시켜 주지만, 젊은이들이 모두 그렇게 다 타락한 것은 아닌 까닭이다. 젊은이 중 많은 이가 이상(理想)을 품고 있으며, 그것은 또 다른 이들에게 이상을 심어 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들의 관대함에 호소하여 성공한 운동의 사례가 많다. 충실하게 성전(聖傳)을 지키는 수도원들이 젊은이를 끌어들이고 있고, 젊은 신학생 출신, 또는 들어갔으면 하고 바라는 수련원 출신의 성소가 결코 부족하지 않다. 종도들의 교훈, “너희는 굳이 서있어 우리가 혹은 말로나 혹은 서간으로써 너희들에게 전한바(교리)를 보전할지니라.-Tenete traditiones. Permanete in iis quae didicistis,"(데살로니카 후 2:14)에 일치하여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옛날 (전통전례를 치루는)세상이 사라져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낙태하는 것과도 같다. 성전을 충실하게 지키는 가정은 대가족이기도 하니, 그들의 신앙으로 인하여 자손이 보장된다. “번성하라!”  교회가 항상 가르쳐 온 것을 그대로 지켜야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