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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강론1. 루터의 미사에서 새미사에 이르기까지(1975년 2월 15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4-26



루터의 미사에서 새미사에 이르기까지(1975년 2월 15일)


 오늘 밤에는 루터의 미사 및 그가 이룩한 전례상의 변혁이 어느 정도로 새미사와 닮았는지를 말해야겠다. 무엇 때문에? 전례 변혁을 맡았던 위원회의 위원장이 직접 말하는 바에 의하면 에큐메니즘(세계교회일치주의)이 변혁의 근본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변혁에 대해서 고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미사와 루터의 전례가 정말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기만 하면, 저 유명한 ‘기도의 법칙은 신앙의 법칙(Lex orandi, lex Crendendi)’ 즉‘신앙에 따라서 기도한다’는 금언(金言)에 따라 신학적인 내용인 신덕도리를 문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루터가 행한 전례상의 변혁 관련사를 기록한 문서는 현대의 변혁을 비추어보는 데 큰 참고사항이 아닐 수 없다.


 사제직 및 미사성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간단하게 되새겨 봄으로써, 루터가 행한 전례 변혁의 목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고찰해 보자. 트리덴틴 공의회는 제 22회기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우리 천주님이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이 임박하시자 최후의 만찬 때에, 당신의 사제직이 끝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어 유형한 제사를 당신의 사랑하는 정배인 교회에 친히 정해 주셨다. 이는 우리가 매일 범하는 죄를 당신의 속량(贖良)하심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힘으로써 기워 갚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당신께서는 종도 및 그 후계자들을 신약사제로 세우시고, 새로운 계약으로 인한 그 사제들에게 없어지지 못할 신성한 인호를 박아 주는 신품성사를 세우셨다.”


 이로써 눈에 보이는 제사가 현재, 우리 제대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행위로써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 주님은 실제로 면주(麪酒)의 형상 안에 실제적으로 현존하시어 당신자신을 직접 천주 성부께 희생제물로 바치신다. 또 우리는 그 희생제물을 받아 영함으로써 주님의 성체 성혈과 하나가 되어 주님과 한가지로 자기를 바치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제직은 신품성사를 받지 않은 평신도 사제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평신도는 사제직이 절대로 필요한 교회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는 하되 사제직(성사를 거행할 수 있는)(주: “만일 누가 신약의 신도들은 모두 구별 없이 사제라고 말하거나 모두 평등한 신권(神權)을 가졌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군진(軍陣)처럼 정서된 성직계급을 혼란케 함이며 바오로 종도의 교리를 반대하여 모두가 종도이요, 모두가 선지자이며 모두가 성사이요, 모두가 목자이며 모두가 학자라 함이니∙∙∙” -트리덴틴 공의회 제22회기)은 아니다.


 또 이 사제직에는 독신제도 및 사제다운 복장으로써 평신도와는 달리 외형적으로 구별함이 타당하다. 이렇듯 사제직으로서 행사하는 흠숭지례(欽崇之禮)의 기본을 이루는 행위가 미사성제다.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피 흘림이 있는 희생이었으나 미사에서는 피 흘림이 없는 희생이라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사제는 변화지례(성변화)의 경문을 외움에 따라서 실현되는, 희생제물을 드리는 행위로써 미사성제를 드리는 것이며, 단지 수난 혹은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을 불과한 말을 낭독하여 미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숭고하고 신비스러운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 및 연옥 영혼이 각각 보속의 공효를 입게 된다는 것은 제헌경에도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희생제물이 실제로 있어야 함에 따라 이 실제적인 존재는 면병과 포도주의 실체가 우리 주님의 성체와 성혈로 변화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체를 흠숭하고 성체께 대하여 지극 정성 어린 공경을 드리는 것이야 말로 타당하지 않겠는가.


 이상의 이유로 해서 성체를 다룰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사제뿐이라는 성전(聖傳)이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사제 홀로 드리는 미사’ 및 ‘사제 홀로 영성체하는 미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공식적인 경신(敬神)의 행위여서 미사성제로서의 가치를 그야말로 온전하게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미사는 사제 및 신자 모두에게 유익하다. 그리하여 교회는 ‘사제 혼자서 드리는 미사’를 적극 권면하고 장려한다.
 

 라틴어 미사에서 핵심을 이루는 기도, 성가, 성례의식(그 중에서도 보석(寶石)은 전문-까논이지만)의 기원에는 이상과 같은 신앙의 원리가 배어 있다. 우리는 트리덴틴 공의회의 해설을 읽는 순간 감동치 않을 수 없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취급하는 것은 참으로 합당한 일이며, 그 중에서도 희생제물은 이리 저리 다 살펴봐도 특히 거룩하므로, 이를 합당하게 그리고 온갖 존경을 다해 봉헌하여 성부께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서, 천주교회는 수세기 전부터 전문(까논)을 제정하되 미사의 정신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고, 오류에 물들지 않으며, 온전하고 거룩하게 했던 바, 그 안에는 거룩함이 속속들이 배어 있어 외형적으로 신심을 촉발케 하는 한 편으로 미사를 드리는 자의 정신 또한 천주께 드리게 된다. 이 전문은 참으로 주님 말씀 자체이고, 종도로조차 전해 내려오는 성전이며, 성인 교황들의 경건한 훈계로써 이루어져 있다.


 이제부터는 루터가 종교 혁명을 어떻게 이루었으며, 급기야 그 스스로 일컫기를 ‘복음적 미사’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만들었고, 어떤 정신에 근거를 두었는지 보기로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1910년에 레온 크리스티아니가 쓴 책의 내용을 살펴본다. 그 이유는 이 도서가 현대 교회의 전례변혁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책에는 ‘루터주의로부터 프로테스탄티즘에 이르기까지’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전례변혁에 관한 루터 자신 및 그 추종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어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을 읽고 연구해 보면 매우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루터 자신이 어떤 정신의 영향을 받았는지 혹은 자유주의 정신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서슴지 않고 직접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동료로서 다음과 같이 간원하는 바이다 ∙∙∙ 신을 향한 봉사에 관련된 본 명령을 잘 살펴서 따르고 싶은 자는 그것으로 자신을 구속시키는 법률로 삼아 읽어 택하든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겠다. 다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가 원하는 때에 받아들이려는 속성이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다. 이제부터는 사람을 위로하고, 사람을 비추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을 위하여 신에 대한 찬송으로서의 예배를 드릴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희생제물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지만 지금부터는 설교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루터는 사제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혼자서 드리는 미사』라는책에서 그는 온 힘을 다해 가톨릭의 사제직이 악마의 발상이라고 납득시키려 애쓰고 있다.그 때문에 루터는, 그 후의 근간이 되는 다음 원리를 끌어내게 되었다.


 “성경에 없는 것은 사탄이 붙여 보탠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사제직에 대하여 눈에 보이게 쓰여 있지 않다. 성경에는유일하신 사제, 유일하신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일에 대해서만 쓰여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한가지로 사제다. 사제직이 유일하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보편적이기도 하다. 사제직을 누군가 독점한다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그리스도인 사이에 교계제도상의 차이를 두는 것은 모두 반 그리스도에 해당된다∙∙∙ 사제는 그저 재앙일 뿐이로다.”

 1520년에 그는 『독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선포함』이라는 책을 썼으니, 그 책에서 ‘로마주의자’에게 자유주의 공의회를 열라고 요구하는 싸움을 걸고 있다.


 “로마주의자가 만든 제일 높은 벽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둔 차별이다. 한편에는 성직자 신분인 교황, 주교, 사제, 수도자가 있고, 다른 편에는 속인 신분인 군주, 영주, 직인, 농민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완전히 조작된 것이어서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진정한 성직자의 신분에 속하며, 역할만 다르다는 것을 빼면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 교황이나 주교가 기름을 바르고 삭발례, 서품식, 축성식을 하며, 평신도와 다르게 옷을 입어 겉모양을 꾸밈으로써 기름 바름을 받은 우상을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나 성직자가 되게 하지는 못한다. 세례를 받은 이라면 누구나 축성된 사제, 주교, 교황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모든 이가 그 역할을 똑같이 한다는 게 좀 합당치 못하기는 하다.”


 이상과 같이 루터의 교리에서는 성직자용 특별 복장과 독신제도를 반대하고 있다. 그 자신 및 추종자들은 본보기가 되려는 뜻에서 독신 생활을 마감하고 결혼하였다.
 
 제2차 바리칸공의회에서 비롯된 사항이 루터의 결론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모르겠는가? 수도복의 폐지, 교황좌에서 인정한 수많은 결혼, 사제와 평신도를 구별하는 모든 표시 제거 등, 이러한 무차별주의는 지금까지 사제에게만 인정되었던 전례상의 성무를 평신도에게는 허용하면서 확실해지고 있다.


 또한 하급신품의 폐지, 차부제의 폐지, 부제의 결혼 등은 사제란 단순히 직무 및 책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낳게 하여 사제직에서 성사를 거행하는 근간이 되는 인호(印號)를 부인하도록 부추긴다. 즉, 서품식이란 공동체를 위한 봉사라면서 ‘봉사하기 위한 사제직’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게 하는 바람에 사제직에 대하여 가톨릭다운 개념을 정립시키는데 있어서 유일한 근거가 되는 ‘희생제사’에 관한 관념을 사라지게 하였다.


 노동사제, 조합활동주의자 또는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기 위해 다른 부업을 구하는 사제 등, 이런 것들이 모든 차이를 없애 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저들은 루터가 행한 것보다도 훨씬 더 앞질러 가고 있는 것이다.


 루터가 교리상으로 범한 중대한 제2의 오류는 제1 오류의 연속으로서 제1의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행실이 아니라 신앙 혹은 신뢰라고 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가톨릭 미사에서 특히 핵심 부분인 희생제물을 드리는 행위 자체를 부인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미사는 찬미의 제사, 즉 찬미, 감사의 행위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보속을 위한 희생제사, 십자가 희생을 재현시키는 속죄의 제사가 결코 아니라고 한다.


 그는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는 예식에 대해 ‘퇴폐성’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 예식에 있어서의 핵심 요소, 즉 미사는 불경건함의 도를 넘어서 혐오할 만하다. 그런 제사를 드리고도 훌륭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미사) 말고는 수도복을 벗어버리고 수도원에서 이탈하고 허원을 깨게 하는 다른 동기는 도무지 없지 않은가. 미사가 그 원인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미사는 화합이고 친교이다. 성체는 한심스러운 삼중의 포로가 되었다. 성체를 평신도의 손으로부터 빼앗은 일, 비굴한 자들이고 고안해낸 온전한 실체 변화에 관한 의견을 신덕도리(도그마)로 밀어붙인 일, 미사를 희생제사라고 한 일 등이 그것이다.”


 이상에서 루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특별히 중요한 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죄 때문에, 죄에 대한 보속 때문에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드리는 것은 명백히 불경스러운 오류이다∙∙∙ 미사는 천주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천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또 성체에 관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신앙은 몰아 부쳐야하는 것으로, 각 지방의 고유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다들 자기가 듣고 있는 약속이 얼마나 위대한지 잘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한다.


 루터는 이상과 같은 이단적인 결론을 이용하여, 희생제사의 속죄적 특성과 보속의 목적을 분명하게 표현해 주는 제헌경(祭獻經)을 없애 버렸다. 그는 전문 중 거의 전부를 폐지하고 극히 미소한 부분만을 그대로 두었지만, 그것도 최후의 만찬만을 서술하였다. 최후의 만찬에서 이루어진 것에 좀 더 근접시켜야겠다면서 그는 면병에 대한 축성경에 ‘quid pro vobis tradetur(너희를 위하여 남기는’)이라는 말을 보태어 붙였다. 그리고는 ‘Mysterium fidei(신앙의 신비)’라는 말과 ‘pro multis(많은 이를 위하여)’라는 말을 없애 버렸다. 그는 면병과 포도주를 성변화케 하는 변화지례의 경문 및 그 후에 계속되는 경문을 다만 설명하는 말로 삼았다. 그는 미사에서 말씀의 전례를 첫째 위치, 영성체(친교)를 둘째 위치에 두었다.


 전례상의 변혁으로 인해 루터의 것과 완전히 똑 같은 변화가 일어났고, 신자들 손에 들려 있는 현대식 경본에는 희생제사를 언급하지 않고 다만 말씀의 전례, 최후의 만찬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만이 들어 있으며, 면병 혹은 성체를 나누어 먹는 설명만을 목전에 두니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새미사 해설에 관한 총칙 제4항을 보면, 이미 프로테스탄트의 사고방식이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 발표된 정정 설명은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다.


 제대의 폐지, 조그만 보자기 한 장만을 덮은 테이블 사용, 신자를 향해 마주 선 사제, 성체보도 없이 맨 성반 위에 놓인 성체, 누룩을 섞지 않은 면병이 아닌 보통 빵을 사용하는 것의 허가,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이 아닌 다른 재질로 된 그릇 및 그 외에도 수많은 부분 부분마다의 변혁은 새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에게 가톨릭의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그리고 대단히 중대하게 어긋나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적인 개념을 가르치고 있다.


 천주교회가 살아남는데 미사성제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미사를 내던지는 것은 교회의 기초 그 자체를 흔드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교 생활, 수도 생활, 사제 생활은 모두 십자가와 제대 위에서 재현되는 십자가의 거룩한 희생제사에 합류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루터는 천주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온전한 실체 변화 및 그리스도의 현존을 부정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면병은 면병 그대로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성체를 경배하는 것에 반발하여 강력히 들고일어난 루터의 추종자, 메라쿤도는 “그리스도는 성체를 자기 수난의 기념으로만 규정했으므로, 성체를 경배하는 것은 우상숭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서 손으로 하는 영성체, 면주의 양형 영성체가 생겨났고, 그 양형을 빌미로 하여 단형에는 우리 주님의 몸과 피가 동시에 현존해 계심을 은연중에 부인하다. 결국 단형 영성체가 불안전하다고 여기게 만든 것이다(주: 양형 영성체란 성체와 성혈 둘 다를 영하는 것이며, 단형 영성체란 성체만 영하는 것을 말함).


 여기서도 다시 현대교회의 전례변혁과 루터의 전례변혁 사이에 기묘한 일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성체를 다룸에 있어서 새로이 내리는 허가는 점점 성체께 대한 공경심을 잃게 하고 잊게 해서, 결국에는 경배하지 않게까지 되도록 유인한다. 손으로 하는 영성체, 평신도 더군다나 여자가 행하는 성체 분배, 장궤 회수의 감소, 이미 장궤하지 않게 된 수많은 사제, 보통 빵의 사용, 평범한 그릇을 성작으로 사용함 등의 모든 변혁은 천주교회가 지금까지 가르쳐 온, 성체 안에 실제적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돕는 것들이다.


 ‘기도의 법칙은 신앙의 법칙’이라는 금언과 같이 원리는 생활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미사예식에서 루터의 전례변혁을 흉내내다 보면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루터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유인할 게 뻔하다.


 새미사가 발표된 후 지금까지 겪고 있는 6년간의 경험이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와 같은 에큐메니즘의 결과는 우선 신앙의 영역에서 파괴적이어서 특히 사제단의 부재, 성소의 감소를 가져오고, 전례에 관해서는 특히 본질적인 문제에서 천주교 신자의 일치를 심각하게 파괴시켜서 프로테스탄트 혹은 그리스정교 신자와의 관계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교회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교회에서도 기본이 되는 ‘사제, 희생제물, 성체’에 관한 프로테스탄트의 생각은 천주교 신앙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트리덴틴 공의회가 열린 지 4세기가 지나도록 교정권에 의한 회칙 모두가 그렇게들 말하고 있는 것은 진담 반 농담 반이 아니고 깊은 의미가 있다 아니할 수 없다. 천주교 신자에게 있어서, 이단자들이 고안해낸 새 전례를 받아들인다는 명목으로 자기 신앙을 극히 심각한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신앙고백인 동시에 기둥인 전례를 버린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나 사목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로테스탄트가 되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프로테스탄트가 행하고 있는 것을 흉내낼 수가 있으랴. 얼마나 많은 신자, 젊은 사제, 주교들이 이 전례변혁이 있은 후에 신앙을 잃고 말았던가! 자연과 신앙을 거슬러 정면으로 맞서노라면 반드시 잡아먹히고 마는 결과가 초래될지니.


 ‘복음적 미사’라는 것의 시작과 끝을 읽어보면, 두 가지 전례변혁이 얼마나 기묘할 정도로 닮았는가를 납득하는 데 도움이 된다.


 1521년 12월 24일, 25일 밤, 군중이 교구의 교회에 밀어 닥친다∙∙∙ ‘복음적 미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캘빈이 설교대에 올라가 성체에 대해 설교한다. 그는 성체를 양형으로 배령해야 한다고 하면서 영성체하기 전의 고해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캘빈은 평범한 복장으로 제단에 선다. 콘피테올(Confiteor-고죄경)을 창하며 복음 때까지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미사를 시작한다. 제헌경, 거양성체 등 희생제사의 의미가 있는 것은 모두 생략해 버린다. 성변화가 있고 난 후에 우르르 몰려 나가 영성체한다. 참례자 중에는 많은 사람이 고해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 중 많은 이가 먹고 마신 상태이며 술을 마신 자도 있었다. 그들도 다른 이와 함께 제단에 다가선다. 캘빈이 성체를 분배해 주고는 성작을 내민다. 영성체하는 이는 축성된 면병을 손으로 받아 쥐고 자기 좋을 대로 성작에 대고 마신다. 성체 하나가 참례자의 옷에 툭 떨어진다. 캘빈은 평신도에게 그것을 집으라고 한다. 평신도가 존경이랄까 아니면 미신적인 표정이 되어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캘빈은 ‘누구든 그것을 밟지 못하겠으면,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있게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고만 말하는 것이었다. 같은 날, 근처의 어느 사제는 약 50명 정도명만이 고해를 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미사 중에 죄 사함을 받았으나, 다시 죄에 떨어져도 되도록 고무(鼓舞)되었을 뿐이다.


 다음 날, 캘빈은 안나 데 모하우와 약혼식을 했다. 사제 몇 사람도 그 표양을 따라 역시 결혼했다. 당시 쯔빙글리는 자기 수도원을 빠져나가 아이렌부르크에서 설교하고 있었으나, 그는 수도복을 벗어버린 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새해에는 양형으로 성체를 분배하였다. 성체는 손에서 손으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자기 호주머니에 넣어 간 자도 있었다. 어떤 부인은 성체를 먹으면서 그 부스러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있었으나, 그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평신도가 직접 성작을 잡고 마시고 있었다.


 1522년 2월 29일, 쯔빙글리는 카타리나 파르키와 결혼했다. 당시에는 ‘사제와 수도자의 결혼’이라는 전염병이 한창이었다. 수도원이 텅텅 비기 시작했다. 수도원에 머물러 있는 수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제단을 때려 부수고, 여러 성인을 그린 성화를 태워 없애 버리고, 병자를 위한 성유까지도 태워버렸다. 사제들 간에는 커다란 무질서가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누구나 저 좋을 대로 제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협의회는 전례를 변혁한 데 따른 질서를 되찾겠다고 새로운 전례를 정하기로 결의했다. 초입경, 영복경, 서간경, 복음, 쌍뚜스는 남겼다. 그 다음 순서로 설교하게 하고 제헌경과 전문은 폐지시켰다. 사제는 다만 최후의 만찬제정만을 낭독한다. 변화지례의 경문은 독일어로 크게 소리내어 읽는다. 성체는 양형으로 분배된다. 아뉴스 데이, 영성체, 베네디까무스 도미노의 노래로 예배가 끝난다.


 루터는 성가를 새로 만들 일이 걱정이었다. 훌륭한 시를 찾았지만 여간해선 눈에 띄지 않는다. 성인을 기념하는 첨례날은 그 자취를 감춘다. 루터는 전례 변혁의 과도기를 잘도 타고 넘으면서 옛 예식을 가능한 한 그대로 남기려 애쓰는 척한다. 또 온 힘을 다해 과거의 날짜를 바꾸려고 가능한 한 은밀하게 서서히 한다. 미사는 대체로 겉모양새는 그대로 유지한다. 민중은 교회 건축물에 있던 묵은 양식을 다시 찾아낸다. 과거와 같은 예식을 기획하여 민중의 마음에 들게 된 다음에는, 여태껏 해온 것보다도 훨씬 더 민중에게 호소한다. 예배의식을 중시하는 것에 점점 더 신경을 쓴다. 민중은 성가나 통성기도를 통해 점점 더 적극적으로 예배의식에 참가한다.


 라틴어는 조금씩 독일어로 대체되어 완전히 그렇게 자리를 굳히고 만다. 변화지례도 독일어로 하는데 변화지례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 빵을 들고 사례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며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것을 받아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남기는 내 몸이니,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그리고는 식사 후에 잔을 들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시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릴 피, 새로운 계약의 피니,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여기에는 ‘너희를 위하여 남기는’이라는 말이 보태지고, 포도주의 성변화에서는 ‘신앙의 신비’, ‘많은 이를 위해서’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이 ‘복음적 미사’에 관한 서술은 공의회가 열린 다음에 이루어지는 전례 변혁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새미사에 그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정말로 위험하다. 왜냐하면, 희생제사라는 관념조차 없는 데다가, 성체에 있어서 현존이라든지 온전한 실체 변화에 관한 관념이란 것은 전혀 없는 젊은 사제는 그 의미도 모르는 채 교회가 해왔던 대로의  의향을 조금씩 잃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드리는 미사는 이미 유효하지 않게 된다.


 연로(年老)한 사제들이, 예컨대 새미사를 드릴 때까지라도 지금까지의 신앙을 지니고 있고 또 여러 해 동안 로마식의 옛 미사를 바쳐왔으며 그 의향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만 하다면, 그들이 드리는 미사는 확실히 유효한 것으로 믿을 만하다. 그렇지만 그 의향이 사라짐에 따라서, 그 의향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이 드리는 미사는 이미 유효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에 가까워지려 했겠지만 결과는 가톨릭만 프로테스탄트화 되고,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화 되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


 5명의 추기경과 15명의 주교가 디이제의 ‘청년회’에 참가했을 당시, 가톨리시즘이 무엇이고 프로테스탄티즘이 무엇인지를 그 청년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어떤 이는 프로테스탄트에 속해서 영성체를 하고 어떤 이는 가톨릭에 속해서영성체를 하였다.


 윌 프랑소아 추기경이 제네바에서 열린 교회통일협의회에 가서는, “우리는 루터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소위 교황대사라는 사람이 그같이 말했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고해성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공동고백을 위한 성사가 마련됐다니 어찌된 일인가!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과연 사목에 맞는 것일까.


 “단체로 죄가 사해졌으니 이젠 영성체를 해도 된다. 그리고 대죄를 범했다면 기회가 닿는 대로, 지금부터 6개월 혹은 1년 이내에 개별적으로 고백하라.”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사목에 있어서 과연 타당한 방법일까? 대죄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견진성사도 같은 상황이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형상(성사 때에 사용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나 네게 십자가의 인호를 친다. 성령을 받으라.’


 그런데 천주님이 견진성사로 주시는 특별한 성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명시되어야 하는데, Ego te confirmo in nomine patris∙∙∙(나 네게 성부와 ∙∙∙의 이름으로∙∙∙)’라는 경문이 없으면 성사는 무효다.


 추기경들이 우리에게 “당신은 권한도 없는 곳에서 견진성사를 주고 있다”라고 한 것에 대해, 나는 추기경들에게 “자기 자녀들이 혹시 견진의 성총을 받지 못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신자들이 걱정하기 때문에, 현재 교회에서 주고 있는 견진성사가 과연 유효한지 의심하고 있으므로 내가 견진을 주는 것이다. 소수일지언정 그 성총을 얻었노라고 확신할 요량으로 그들이 견진성사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기 때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예컨대 불법이라 해도, 유효한 견진을 베풀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성사를 거행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회의 실정법이 천주님의 자연법과 초자연법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대립하는 경우에는 천주님의 자연법과 초자연법이 교회의 실정법보다 상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 일찍이 그 전례(前例)가 없는 교회의 위기를 겪고 있다. 그 변혁에 발맞추어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변혁에서 비롯된 열매로서 선한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말이다. 자문자답해 본다. 전례의 변혁, 신학교의 변혁, 수도회의 변혁, 모든 수도회에 있어서 최고 간부회의 변혁,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게도 수도원은 도대체 어디로 끌려갔다는 말인가! 자취도 없이 몽땅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수련자도 없고 성소도 없다.


 신시내티의 추기경 대주교도 로마에서 이루어진 주교들의 시노드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우리네 나라-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에서는 사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들 잘 모르기 때문에 성소(聖召)라는 것이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 성전(聖傳)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전만이 참된 성총을 가져다준다. 성전을 버리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교회를 파괴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 나는 추기경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의회 때에 있었던 종교의 자유에 관한 개요가 모순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그 개요 중 제1부에서는 ‘성전은 그 어느 것으로도 바꾸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내부적으로는 온통 성전에 반대되게 말하는 것 투성이다. 그 개요는 그레고리오 16세와 비오 9세 그리고 레오 13세께서 말씀하신 것과 완전히 반대이다.”
 
 따라서 선택해야 한다. 공의회에서 말하는 종교의 자유에 찬성하여 저 교황들께서 계속 말씀해 오신 것을 거슬러 반대할 것인가, 아니면 저 교황들께서 말씀하신 것을 편들어 종교의 자유에 관한 그 개요에서 말하는 것에 반대할 것인가.


 서로 정반대인 두 가지를 동시에 다 찬성 및 동의하는 일은 불가능한 노릇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했다.


 “나는 성전을 택한다. 성전을 지지한다. 자유주의 변혁은 지지하지 않는다. 반세기 동안 모든 교황들께서 배척해 온 것이란 오로지 그 자유주의가 아니었던가. 그런 자유주의가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 안으로 들어 왔다. 자유, 평등, 박애의 탈을 쓴 자유주의가.”


 자유, 그것은 종교의 자유를 말한다. 평등, 그것은 무차별주의다. 박애, 그것은 에큐메니즘 운동이다. 그것들은 자유주의의 3대 원칙으로 17세기의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다가 그 원칙이 프랑스 혁명을 낳았다. 급기야는 그 관념이 애매한 말을 매개체로 하여 공의회에 침투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때문에 교회가 자멸(自滅)을 향해 내달리고 있으니, 그런 관념은 자연과 신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에 완전한 평등이란 없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든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교황 레오 13세는 ‘자유에 관한 회칙’에서 그것을 매우 명백하게 표현했다.


 박애(형제애)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어느 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같은 아버지로 두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서 과연 형제애를 찾을 수 있을까. 천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계시지 않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가 형제일 수 있다는 말인가. 같은 아버지가 없이 어떻게 형제가 될 수 있는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꼭 교회의 모든 원수들의 뜻대로 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아야만 하는가. 공산주의자, 불교도, 그리고 프리메이슨과 같이 교회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의 생각대로 되게 내버려두어야 하겠는가.


 지금으로부터 1주일 전에 발표된 법령대로라면, 가톨릭 신자로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는 사람에게는 파문이라는 제재가 이미 없어진 듯하다. 프리메이슨은 포르투갈을 파괴하였다. 칠레, 아르헨티나와 함께 있던 자는 도대체 누구였는가. 그리고 지금은 남부 베트남에 있다. 그들은 가톨릭 국가를 모두 파괴시켜야 한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등등. 프리메이슨은 가톨릭 국가를 파괴하려는 자들이다. 스페인, 이탈리아에서는 프리메이슨의 활동이 어떤가. 교회는 어찌하여 교회의 원수인 그런 자들을 향해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인가. 오! 우리가 얼마나 더 기도하고 빌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겪어본 역사조차 없는, 악마가 교회를 공격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성모님께,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내일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의 권능과 광영을 이루신 것에 맞서는, 그 같은 모독과 독성을 천주님이 그대로 받아주실 리가 만무하다. 많은 나라에서 합법화시킨 낙태 관련법, 이태리에서 허가된 이혼, 이 모든 도덕률의 붕괴, 진리의 파괴를 생각해 보라. 어느 날 천주께서 그에 관해 입을 열지 않으시고 세상을 엄벌에 처하시는 일없이 그대로 내버려두시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도 못하겠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우리 형제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천주님께 청하고 또 구해야 한다. 성전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할 것이며 겁내지 말아야 된다. 특히 우리 미사성제의 예식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미사야말로 교회의 기초인 동시에 그리스도교 문명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참된 미사가 교회 안에서 사라지고 만다면 교회는 그 모습을 잃고야 말리라.


 우리는 이 전례를, 이 희생제사를 굳이 지켜야겠다. 오로지 이 미사 때문에 우리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는가. 다른 미사를 위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이 아니다. 미사의 희생을 위해서 세워진 것이지, 최후의 만찬, 회식, 기념, 친교를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우리 제대 위에서 계속되고 있는 우리 주 예수교회를 세운 것이 아닌가. 결코 회식이나 친교, 기념을 위해서가 아니다. 절대로 아닐지니!


 여러분, 신덕을 간직한 상태로 신학생을 위해서, 우리 신학생들이 참된 사제가 되도록, 그리하여 참된 성사를 거행하고 참된 미사성제를 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었으면 좋겠고 또 부탁하는 바이다.

http://www.sspxasia.com/Documents/Archbishop-Lefebvre/Luthers-Mass.htm


 (이태리의 피렌체에서, 1975년 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