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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강론 2.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1975. 1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5-11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 -미사성제- (1975. 11. 오타와)


 지금 시대에 가장 긴급한, 가톨릭 신앙을 보존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해야겠다. 전례상의 변화라든지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유래한 개혁 중에서 어느 한쪽 측면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세부사항도 나름대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너무나도 중요한 우리 신앙의 본질을 보존하기 위한 싸움에 필요한 용기를 복돋우고, 계속 전진하기 전에 우리 신앙의 본질을 우선적으로 확립시켜야 한다고 주의(主意)를 환기시키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속하시려 이 세상에 강생하셨으며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을 이루셨다. 천주성자께서 사람이 되신 목적, 즉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생활하신 것 중에서도 핵심은 신자들, 즉 가톨릭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온 인류를 구원해 주시고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애석하게도 인류가 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니, 많은 사람들이 불교도, 회교도, 혹은 프로테스탄트가 되고 말았다. 모든 이 -적어도 구원받기를 원하는 이-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성혈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이는 물론, 가톨릭 신자인 우리에게는 간단명료하여 말할 필요도 없는 것으로, 바로 우리 신앙인 동시에 우리가 항상 배려온 신앙인즉, 현대에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온 인류에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이 진리, 즉, 그리스도 밖에서는 절대로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바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가톨릭인이 얼마나 많은가?


 가톨릭인으로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옛 금언에 의혹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모든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현대의 인류가 맞닥뜨리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구원받으려면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구에 의해 구원되는가, 그리고 어떤 식으로 구원되는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없다. 현세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다른 문제가 있을까?


 그런데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 달리 말해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연히 지옥에 간다고 외치면 틀림없이 현대의 많은 가톨릭인들은 들고 일어나 말도 안 된다면서 아우성을 친다. 지금 이 문제는 온 인류가 풀어야 할 중요한 하나의 과제처럼 되고 말았다.


 교회는 모든 진리의 보고(寶庫)인즉, 소위 가톨릭인이라면 교회가 항상 단언해 온 그대로 단언해야 하는 바, 진리란 다름이 아니라 천추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과 천주 성자께서 인류 전체를 구원해 주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천주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원천이 있을 수 있으며, 가톨릭인인 우리가 루터나, 부처나, 모하메드 역시 영원한 구원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도 하늘에서 천주 우편에 좌정해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오늘날에는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어처구니없게도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명백한 진리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있다.


 프로테스탄트나 불교도가 천주께 대한 애덕의 행위로써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및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을 묵시적(黙示的)으로 이루어지는 화세(火洗)라고 한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되지 못한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가톨릭인인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인즉. 교회가 항상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또 다른 천주, 또 다른 진리, 또 다른 구원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계실 뿐이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이며 기초인 동시에 목표이고, 언젠가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생활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영광스러운 관(冠)을 쓰게 되는 것도 그것을 통해서이다. 한 마디로 지상에서건 천국에서건 오직 하나이신 우리 기쁨. 예수 그리스도밖에 아니 계신 것이다.


 확신하건대, 이 진리를 단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이해하리라. 우리가 아닌 예수님이 직접 당신의 성총을 받기에 적당한 방법을 골라 주셨다. 당신이 택하신 수단은 십자가인즉, 지상의 우리 제대(祭臺) 위에서도 십자가 및 십자가상에서의 당신 희생이 계속되도록 정하셨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갈바리아가 계속되는 곳은 우리 제대 위 말고는 어느 곳에도 없다. 가톨릭인들은 대대로 미사성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올바르게 알았었다. 성조(聖祖)들 대부분이 그렇게 확신했으니, 그래서 각 나라를 장식하고 있는 보배로운 교회 건물과 유럽의 독특한 성당과 대성전을 세운 것이 아닌가? 세계 각지의 방문객들이 이 유적을 보러 와서는 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이 행한 놀라운 업적과 천재적인 재주 앞에서 경탄해 마지않으면서 발길을 멈추고 있다. 그들이 어째서 무력한 자기 생명을 수십 년씩이나 소진시키면서까지 그렇듯 장엄한 성당과 기념물들을 세운 것일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대 때문이며, 그 위에서 제헌되는 거룩한 미사성제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돌 것을 바라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당신의 종도들을 사제로 세우시면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명하신 때인 첫 희생제사의 시기, 바로 최후의 만찬에서 사제직을 세우셨다. 트리덴틴 공의회가 가르치는 대로 최후의 만찬은 정말로 희생 제사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녀들에게, 다가올 세대에게 나의 이 행위를 묘사해 주어라. 이 이야기를 해 주어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를 행하라. 이를 거듭 행하라. 내가 행한 것을 이대로 계속하라”고 말씀하셨다. 미사성제가 설화 내지는 이야기가 아니고 행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내가 왜 이토록 강조하는지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우리 시대에 들어서면서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 바가 파괴되고 부인되며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세 시대에 그랬듯이, 거룩한 신앙을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두들 하나같이 영광스럽게 여기고 온 마음을 다해 되찾고자 하며 되살아났으면 참 좋겠다고 여기는 그리스도교 문화의 이상(理想)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꼭 필요한지를 주장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세상은 중세 시대를 비웃고 있다. 현대인은 그 시대가 암흑의 시기, 어둠의 시대였다고들 하지만 역사 자체로 보아 13세기, 즉 중세 시대처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 인류가 경험한 시기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기는 없었다.


 왜 그런가? 미사성제 때문이며 미사로써 이루어지는 영성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문명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제대와 더불어 사제들이 십자가 희생을 실제로 재현하는 미사성제를 봉헌하는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문명 전체가 우리 제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제대(祭臺)를 무너뜨리고 테이블로 바꿔친다면 그것은 그 테이블 위에서 그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기만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최후의 만찬 때 당신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말뿐인 것으로 만드는 것인 동시에, 그로서 그리스도교 문명이 점유하고 있는 기반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렇게 되면 가톨릭교회란 아예 없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교회는, 무슨 연유로 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이 참으로 생활하신 성체성사에 계시는가에 관한 교리, 거룩한 희생제물이 제대 위에 실제적으로 현존하시는가 하는 교리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는 우리 영혼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깨우쳐 줌과 더불어 훈련시키며 영혼의 질서를 바로잡기 때문이다. 성체께서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질서의 악취를 풍기게 된다. 오늘날 사제가 그토록 적은 것을 두고 왜 그런가 하고 의아해 하는 일이 잦다. 그 이유는 바로, 더 이상 미사성제 속에 젖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사제에게는 그 이상의 추구할 만한 관념, 그 이상의 목표가 없다. 사제의 목표는 언제나 천주님의 제대로 나아가 갈바리아의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것으로 인해서 사제가 숭고한 존재가 되고, 젊은이가 사제 성소(聖召)를 이상(理想)으로 여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도자들, 수녀 및 수사들에게도 미사성제가 그들 성소의 기반이며 여러분이나 평신도에게도 마찬가지다.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란 본질적으로, 제대의 생활한 제물이신 우리 주님과 결합하여 자기를 봉헌하는 사람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와 결합하심을 상징하는 혼인의 성사와도 같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생명을 내놓으셨듯이, 배우자도 가족을 위하여 그리고 서로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놓는다. 그 결합은 갈바리아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생활한 상징이며, 그래서 배우자끼리 결합을 이룰 때 희생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힘과 용기를 미사성제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다. 미사성제 없이는 가톨릭의 영성도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인의 생명도 있을 수 없으며 대대로 교회의 생명이 되어 온 온갖 것이 일순간에 쇠퇴하여 존재할 의의를 잃고 만다. 이제 우리는 참된 미사성제에 절대로 필요한 것을 지니게 될 참인데, 이는 가톨릭인인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근대에 들어 우리 교리가 희생제사로서의 성체성사보다는 성사로서의 성체성사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 왔음을 십분 인정한다. 물론 좋은 뜻으로 성사로서의 성체에 비중을 크게 둔 것이다. 예컨대,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흠숭을 드리는 기회를 신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가톨릭계 전체를 망라하는 대규모의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곤 한다. 그리고 그런 성체대회는 성체성사 안에 우리 주 예수께서 실제적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신자들이 더욱 신뢰하게 하는 살아있는 증거였고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근세기에 들어 교회가 - 성체성사로서의 성체 - 안에 우리 주께서 실제적으로 현존하심을 많이 강조함에 따라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희생제물로서의 성체의 의미는 다소 경시된 것으로 보인다. 성사로서의 성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희생제물로서의 성체야말로 성사로서의 성체의 원천이므로 희생제물로서의 성사의 비중을 되살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사로서의 성체는 십자가 희생에서 비롯된다. 성사는 생활한 제물이 없다면 실제적으로도 현존하심도 있을 수 없고, 분배도 있을 수 없으며, 신자들의 영성체도 있을 수 없다. 한마디로, 성체성사를 모시면서 – 영성체시 -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제헌하신 그리고 죄의 사함을 위해 우리 제대에서 매일 피 흘림 없는 형상으로 당신 자신을 제헌하신 생활한 제물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물, 그리고 성체 안에 우리 주님이 실제적으로 현존하심이라는 깊고 깊은 속뜻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희생으로부터 성사가 생겨났으니, 거룩한 성체성사는 십자가라는 오묘한 나무의 열매다.


 그러므로 구원에 없어서는 아니 되는 미사성제에 관한 관념으로 돌아와, 이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우리 문명이 찬연히 빛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한편으로, 오늘에 이르러 제각각 우리 주께서 성체 안에 실제적으로 현존하심에 대해 의혹을 보임과 더불어, 즉 미사성제를 공격하고 파괴하며 금하기 시작하자 우리 문명, - 서양문명, 그리스도교 문명- 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우리 그리스도교 문명의 쇠퇴가 시작됐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듯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현상의 근원은 14세기 베렝거(Berenger)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16세기에 이르자 루터는 당돌하게도 미사가 희생제사가 아니라고 감히 공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루터의 공격은 지극히 보배로운 교회의 중심 교리로 향한 것이었노라고 할 수 있다. 드디어 그는 미사의 희생제사적 성격을 훼손시킴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사제직을 파괴시켰으니, 희생제사 없이는 어떤 이상도 없기 때문이다. 사제란 단지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나누려고 모인 이들 가운데에서, 기획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던 것이다.


 루터가 450년 전에 이룬 것이란 고작 그런 것이었으니, 이 시대에는 그가 일구어 낸 혁명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대로 전례가 변화되고 있다. 많은 변화 요인이 이상하리만치 똑같다. 루터의 혁명기에 독일어라는 자국어가 채택되자 말할 것도 없이 열렬한 환호를 불러 일으켰다. 젊은이들은 열성적이었고, 이제는 평신도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며 교회가 더 복음적이려면 어때야 하는지 감독할 수 있게 되고 더 의미심장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평신도들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새로운 역할을 찾아 점유했다. 그러나 젊은이다운 열정의 도취감은 곧 환멸로 향하는 길을 터 주었다. 즉 사제직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사제와 수녀들이 자기가 속한 수도원을 떠났으며, 수도원이 텅텅 비고, 수도자들은 결혼했다. 처음에는 그토록 열심하고 열성적이다가 어떻게 해서 그리고 빨리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혁명가들이 그리스도 교회의 근본적인 요소, 즉 미사성제를 공격했으므로 전체적인 상황은 마치 갈잎에 붙은 불과도 같았다.


 미사성제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오래지 않아서 성체께 대한 전통적인 공경심이 무너졌다. 신자들은 서서 영성체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손으로 영성체하게 되었으며, 그리고는 혁명가들이 공공연하게 실제적으로 현존하시는 지고(至高)의 희생제물을 부인하고, 교회가 보물과도 같이 그토록 아껴 간직했던 사제직을 부인하기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프로테스탄스 혁명은 우리 문명의 뿌리에 타격을 주었고, 종교혁명의 신조에 자유주의 신조가 첨가되기까지는 벌써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결국 17세기가 데카르트(Descartes)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진리가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관념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즉, 진리는 우리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천주께로부터 또 그리스도께로부터 비롯된 진리의 관념을 거부했다. 그리고 18세기에는 루소(Rousseau)가 데카르트에서 일보 전진하여 도덕률에 대한 공격으로 방향을 조준하였다. 즉, 인간은 선하다, 인간의 양심은 선하다는 것이었으니,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를 인도한 것은 법이 아니라 그의 양심이었다. 그들 세 사람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공격했던 데카르트, 그리고 도덕률을 공격했던 루소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선구자들인 셈이다. 오늘날에는 신앙, 진리, 그리고 법이 전적으로 상대적이며 각자의 양심에 따르는 주관적인 것이라고들 한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이상의 내용이 자유주의란 도대체 무엇에 관한 것인가의 실체다. 인간은 자유로워졌고 방종하게 되었으며 드세져서, 이제는 자기 양심과 의지만을 따르게 되었다. 그 자유화라는 것이 실제로 사회에 대하, 우리 문명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인간의 영적인 생활이 전적으로 그리스도, 당신 사랑의 법, 또 인간을 변화시켜 당신의 법률을 꼭 지키도록 작용하시는 성총의 선물로 인한, 천주님 및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인간성을 파괴시켰다. 절대적인 진리란 것이 도무지 없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창조한 진리라면, 우리는 충분히 만족함으로 해서 더 이상 천주님은 계시지 않은 꼴이니 천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실제로 인간 스스로가 신격화되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인간을 초월하시는 천주님을 거부하게 되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본성적으로 파괴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루소를 뒤이어 19세기에 주관론의 철학자들이 나타났는데 칸트(kant),헤겔(Hegel), 또 다른 이들도 모두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파괴시키는 데 공헌하고 진보적인 역할을 한 자들이다, 그 관념들은 자유주의 원칙이 그리스도교 사회의 관념을 실질적으로 파괴시킬 때까지 조금씩 그 길을 터놓았다. 18세기말에 프랑스는 이미 그리스도인의 법, 가톨릭 왕의 법, 한마디로 천주님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이상의 내용이, 국가적으로 천주님의 정신을 파괴시키고 이성신(Goddess Reason, 理性神)을 정식으로 받들게 된 이유인 동시에 과정이다(역자 주: 이성신이란, 천주님의 정신에서 이성을 따로 분리시킨 것으로, 프랑스어에서는 이성이라는 단어가 여성명사임으로 해서 신격화된 이성을 말함.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혁명정부는 천주교를 금지하고 교회재산을 몰수했으며 그리스도 왕을 표방하는 왕을 단두대의 이슬로 보내고,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de Paris Cathedral)을 이성신에게 바침은 물론 공식적으로 숭배했음).


 교회는 물론 그런 경향에 저항했었다. 1세기하고도 반세기동안 - 약 1800년경부터 1960년경까지 - 역대 교황은 소리높이 외치면서 그런 경향으로 말미암은 사회 윤리적 질서의 파괴를 막으려 혼신의 힘을 다했고, 회칙을 발행했으며, 가능한 수단이란 수단은 있는 대로 죄다 이용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혁명과 자유주의의 도래에 기원을 둔 그런 관념들은 그 길을 야금야금 닦아 나갔고, 사회는 오염되었으며, 사람들을 보호하여 지금까지 질서정연한 상태가 되게 해 주었던 방벽들이 무너져 내렸다. 마침내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유데아인들이 외쳤듯이 이 국가들은 "우리에게는 카이사르 외에는 어떤 왕도 없다"고 하였고, 그로써 정교(政敎) 분리가 초래되었다. 법정에서, 군대에서, 대학교에서, 학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몰았다. 십자고상이 공공건물에서 밀려났고, 성직자는 교회 내부로 떠밀려 들어갔으며, 사회는 세속화되었다.

 그러자 사회가 자유로워지고 천주께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곧 사고의 자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는 이제, 1세기하고도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는 다들 외설 책자에 사로잡힘과 더불어 사회 전반에 걸쳐 자유를 핑계로 도덕성, 가족과 사회 자체를 파괴시키기만 하는 텔레비전 및 다른 전달 매체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교회는 약 1960년대까지는 모든 형태의 자유주의에 결연히 대항했었다. 교회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의 법에, 당신의 희생에, 당신의 성사 및 성총에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가 진리, 참된 자유, 죄의 노예됨으로 부터 해방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며, 일찍이 죄로부터 해방되어 성인다음에 예속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가 얼마나 심하게 쇠퇴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가톨릭 교리, 꽤나 장황하게 묘사한 바 있는 캐나다의 가톨릭 교리는 파괴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과정의 완벽한 사례인 동시에 파괴에 완전히 빠져들고 만 교리다. 본래의 가톨릭 교리는 죄와 결별하라고 제안하는데, 현대의 가톨릭 교리는 전통 및 교리가 사회적으로 금기시하라고 했던 것을 무너뜨리고 가족을 파괴시키며 우리 문명을 결합시키는 절제와 결별하라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오늘날 여러분의 자녀들은 가톨릭 교리로써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것을 배우고 있다. 복음에서 말씀하시되, 파괴하라고 가르치셨는가? 복음은 오히려 자비와 사랑으로 단단히 결합되어야 한다고 훈계하신다. 천주를 사랑하라, 부모를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이다. 이는 강력한 결속인 동시에 의무적인 결속이다. 우리는 사랑으로 똘똘 뭉쳐서 사랑이 아닌 것에는 도무지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천주를 사랑해야 하고 부모와 사회를 사랑해야 함은 물론 사회는 천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


 우리 자녀들에게 전달해 준 관념이 생활 전반에 퍼져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파괴되고 부서진다면, 그런 관념은 죄가 되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자녀들이 어린 적에나 혹은 더 나중에라도 변증법이라는 것에 의해 계속 침식당하는 바람에 기존의 것과는 영 딴판으로 자라게 한 결과, 끝내 '자아'를 이룬답시고 자유로워짐으로써 자신을 소모시키고 마는, 죄가 되는 관념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당히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게 뻔한 즉, 이제는 가톨릭의 교리 체계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새 교리문답은 자유주의의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또 우리 교황들이 그토록 자유주의를 반대했고, 왜 그래야 했는지 알고 있음에도 현대인들은 공공연하게 자유주의가 교회를 눌러 이겼노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 문화, 우리 사회, 우리 대학교, 우리 학교에 스며들고 만 것이다. 안전한 영역이란 모두 다 없어져 벼렸고 우리 가족들마저 자유주의라는 독극물에서 안전하게 격리되어 있지 못하다. 우리 신학교들은,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과 같은 사람들이 제안한, 진리란 상대적이고 진화하고 있으며 인간적이라는 생각들로 오염되었다. 이제는 불변의 진리란 것이 사라졌고, 그에 따라서 불변의 교리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는 정말이지 비극적이게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비롯되었다. 가장 좋은 예증은 가우디윰 엣 스페스(Gaudium et Spes 기쁨과 희망)이다. 변화된 생각, 진리의 진화라는 것에 적어도 두 페이지나 할당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변한 것이란 '새로 만든 것'에 일익을 담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롭게 눈뜬 자연의 정복이라는 결과로서 철학에서의 변화, 표현과 행동에서의 변화, 종교를 이해하는 방법에서의 변화, 과거에 이해했던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는 더 이 이상 용납되지 못한다는 깨달음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 조건에 직면한다.


 예컨대 신학교에서는 이제 개종해야 한다는지, 복음화되어야 한다든지, 혹은 비 그리스도인들을 개종시켜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 오히려 열정적인 대화를 통해 저들을 이끌어야 한다면서, 자기 발견 및 비 그리스도인의 신앙도 우리 신앙만큼이나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고들 하고 있다. 이는 물론 명백한 이단으로 예상된 결과를 초래했는데 매우 짧은 시간에 걸쳐 교회의 전교 정신을 완전히 마비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전교의 정신이 죽었음을 모른다면, 사제다운 정신이 아직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들은 오늘날 가톨릭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자극제조차 없이 내버려두는 요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수계범절에 충실한 생활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최근에 신시내티의 주교가 로마 시노드에 보고하되 사제 성소의 위기에 관하여 심각하다고 한즉, 현대의 교회에서 성소가 부족한 것은 사제가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이렇듯 믿을 수 없는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서 사제가, 자기가 무엇 하는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언제부터 사제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혹은 무엇 하는 사람인지를 모르게 되었다는 말인가? 세상에, 가톨릭교회에 사제가 생긴지 2,000년이 지난 다음에 갑자기 사제를 이루는 게 무엇인지를 더 이상 모르다니!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제대를 테이블로 바꿔침으로써 제대를 파괴시키고 14세기부터 순교자들의 성해를 모셨던 성석(제대석)을 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희생제물은 돌 위에서, 돌 제대 위에서 제헌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제물도, 돌도, 성해도 없어져 버렸다. 미사는 식사가 되어 버렸다. 성해란, 순교자들이 우리 주님과 결합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쳤음을 의미한다. 이런 경탄할 만한 상징을 저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일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으니, 거룩한 가톨릭교계의 어느 부분에선가 극히 신성한 것이 온통 매수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모든 장난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비롯되어 교회에 스며들었다.


 내가 공의회를 공격한다 하여 다들 비난을 퍼붓는다. 자유의 정신이 교회와, 사제직과, 성사와, 미사성제와, 가톨릭 교리와, 가톨릭 대학교와 가톨릭 학교를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을 내가 간파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내가 공의회와 다르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되는 만큼 여러분도 더욱 더 확신하지 않는가! 여러분에게는 과거로부터의 항구한 본보기가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녀를 비 가톨릭학교, 프로테스탄트 학교에라도 보내는 것을 오히려 좋아하게 되었으니, 거기서는 자녀가 자기네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덜 타락하기 때문이다.


 이는 1955년 몬시뇰 카바다(Msgr. Cavana)의 자랑스런 방문이 있었던 때인 20년 전에 신학생들로 가득 찬 새 신학교를 방문했을 당시의 캐나다가 어땠는지를 되새겨 보면, 그리 수긍하지 못할 스캔들도 아니다. 그래도 1965년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가 지금은 그 신학교가 팔렸으며, 그 사업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상태다. 20년이 채 안된 샤르부룩(Sherbrooke)의 신학교와 같은 신학교들이 그런 식으로 처분되는 동안 전 세계의 교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최근에 교회의 전통을 보전하고자 하여 통상정인 결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어쩌면 이탈리아에 전통을 지키는 사제들의 모임을 창단하기를 원하는 사제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면서 돌아다니고 나서 갓 돌아온 이탈리아 주교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압도당한 채 돌아왔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교구를 거의 다 샅샅이 방문해 보니, 곳곳의 신학교들이 다 팔리고 있으며 젊은 사제들이 옷을 벗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에 비해서 이탈리아의 사제 수가 평균 3배 정도 더 많았는데도 신학교는 텅텅 비었다는 것이다.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투린(Turin)은 이웃의 몇 개 교구에서 온 80명의 신학생만이 있을 뿐이었단다. 까세르따(Casserta)의 주교는 자기 신학생들이 현대주의자가 되어 돌아와서는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으려 한다고 털어놓았다. 오늘날 사제직의 상태 및 신학교의 상태를 생각해 본즉, 지금부터 불과 몇 년 후에는 과연 어떤 모양의 교구가 될까?


 프랑스의 경우를 보면, 매년 총 100개 교구의 신학교에 입학하려는 새 후보자가 대략 100명 정도가 된다. 주목할 만한 신학교는 겨우 1개교만 남았을 뿐인데, 파리 근교의 이시레물리노(Issy-les-Moulinaux)에는 25개 교구 및 4, 5개 종교 단체를 흡수하여 신학생이 고작 80명이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이 과정을 마칠 자 과연 몇이나 될까? 또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현재와 그들이 서품 받을 시기 사이에, 결국에는 로마가 기혼 성직자를 인정하고야 말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생활하고 있을까?


 공의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런 상황은 극히 심각한 상태다. 공의회 속속들이 제멋대로 하고 싶은 열망만으로 가득 찼음이 분명하다. 변화를 위한 변화라는 관념을 통하여 이미 정해진 법에 반하는 개인 양심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통하여, 모든 종교의 자유에 대한 관념을 통하여 공의회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애매한 어휘로써 자체를 묘사했다. 교회가 언제나 믿어 온 것을 보면 교회만이 진리인즉, 그것은 교회의 타당한 해석과는 반대된다고 여겨진다. 또 만일 가톨릭 국가가 그 관할권 내에 이단이 퍼지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방벽을 전혀 마련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사실상 그로 인한 부수적인 온갖 오류를 통하여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상태가 될 것이 틀림없다. 혼인에 관하여, 예를 들면, 은연중에 그리스도인 사회인 가톨릭 사회를 침식시키는 모든 것, 이혼을 허용하게 한다든지 피임과 낙태를 허용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정확히 말해서, 본격적인 자멸이 교회를 덮치고 있는 중이고 점점 더 확연해지고 있다.


 이상의 내용이 그토록 전통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이며 거룩한 가톨릭교회의 광범위한 파괴라는 대홍수에 직면한 우리가 가톨릭 미사, 가톨릭 성사, 가톨릭 교리, 우리 가톨릭 대학교, 그리고 우리 가톨릭 학교를 굳이 지키려는 데 대한 이유이다. 우리는 학교들이 어떤 면에서든지 제멋대로 되어 가는 것을 거부하는 동시에 가톨릭다운 학교를 관철하여 자녀를 가톨릭으로 키울 것이며, 가톨릭다운 대학교를 고수하여 자녀들이 나쁜 길로 이끌리지 않게 할 것이다. 이제는 청년이나 여학생을 가톨릭 대학교에 함부로 보내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들을 오히려 주립대학교에 보냈으면 좋겠다. 현대의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이 자기네 좋을 대로 밤이건 낮이건 아무 때나 왔다 갔다 하고, 내키는 대로 매일 미사에 참례하거나 참례하지 않거나 한다.


 그러므로 와해 상태인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해서 우리 저항이 변화의 길에서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에콘(Econe)에 있는 우리 신학교의 문을 닫으라는 지시가 있었다. 내가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신학생들이 절대로 프로테스탄트가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우리 신학생들이 현대주의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우리 신학생들이 자신의 신앙과 견해를 잃지 않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명령에 저항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도무지 없지 않겠는가?


 로마로부터 온 명령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느냐고들 한다. 그런 명령이 로마에서 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어떤 로마로부터인가? 나는 영원한 로마, 최고 권위의 로마, 교회에 생명을 주는 로마, 교회의 참된 전통을 바르게 전달해 주는 로마를 믿는다, 다들 내가 불순종하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정말로 비난거리가 될 만한 지시를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귄위가 어떻게 해서 주어진 것이냐고 되묻고 싶을 따름이다. 교황, 추기경, 주교, 사제들은 생명, 영적 생명, 초자연적 생명, 영원한 생명을 제대로 전달하라고 자신의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면에 있어서도 부모 및 사회는 생명을 전달하고 보호하라고 그 권위를 부여받았다.


 '권위'라는 말은 '창조자', 생명의 창조자를 의미한다. 죽음을 전하는 것과는 도무지 상관이 없어야 하니, 사회는 낙태를 인정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 안 된다. 낙태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같은 식으로 교황, 추기경, 주교들 및 사제들은 영적인 생명을 전달하고 유지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 불행히도, 오늘날 그들 중 많은 이가 더 이상 생명을 전해주거나 유지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인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이 우리 신학교를 폐쇄시키라는 지시를 받고도 순종하지 않는 이유들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영혼의 생명을 전해주는 모범적인 사제에 알맞은 진정한 자격을 지녀야 한다고 믿는다. 여러분이 무효한 성사를 집행하는 데나 알맞을 그런 사제들은 원치 않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때때로 견진성사를 거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물론 그것은 나에게 특정 지역의 교구에서는 견진성사를 거행할 자격이 없다고 상기시켜주는 특정 지역 교구의 주교들을 자극하고 있다. 당연히 그것을 알고 있지만 거꾸로 저들에게, 자녀가 성사적 은총을 받았으면 하고 부모들이 원하는데도 유효성이 의심스러운 성사를 거행할 권한이 있느냐고 되묻고 싶다. 그런 부모에게는 자기 자녀가 확실하게 견진성사의 은총을 받고 있다고 믿을 권한이 있다.


 그것은 영혼을 살리는 은총이니. 그런 뜻에서 나는 다른 누군가의 교구에서 성사를 거행하는 불법을 감행하면서까지 내 자녀가 견진성사의 성사적 은총을 받았다고, 부모들이 확신하는 걸 더 보고 싶은 것이다. 적어도 여러 세기 동안 교회가 규정한 방식대로 견진을 받을 자녀들이 자신 안의 성사적 은총을 정말로 유지하고 있는지, 성사가 참으로 유효함을 아는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유효성이 의심스러운 성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주교들은 거의 확증해 주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주교 대리나 다른 사제들에게 위임하면, 그들 중 많은 이가 새로 인가된 형식까지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각 성사 고유의 성사적 은총은 분명하게 명시되어야 하는데도 내용이 그렇듯이 많이 변화되어서 문제의 성사를 제대로 표현해 주지 못하니, 성사가 무효하다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달리 말하면 성사의 신앙 고백문을 우롱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미사성제에서 축성경을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것 또한 용납하지 못한다, 꼭 교회가 항상 의도해 온 그대로 이행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온통 극히 중요한 것이 엉망이여서 이도 역시 우리 전통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인 동시에 어떤 어려움도, 어떤 장애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다. 우리는 현재 진정한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교회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인정하기를 애써 피하려는 주교들 및 사제들의 격렬한 반대를 야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리라. 그러면서도 항구한 교회를 따름에 있어서, 우리 정신적 지도자들을 위해서도 역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것은 어느 것도 지향하지 않는다. 에콘의 우리 신학교에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불합리한 계통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불합리성에 직면하여 나는 그저 내 귀와 눈을 꼭 막은 채로 신학생들을 계속 받아들이기만 할뿐이다. 1975년 9월에 에콘에서는 25명의 후보자, 독일계 스위스인 콘스탄스호(Lake Constance) 근교의 새 독일어권 신학교에서는 5명의 후보자를 맞아 들였다. 또 미시간에 소재한 아르마다의 새 수련원에서는 12명을 맞아 들였다. 성소가 부족하지 않으며, 우리는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는커녕 오히려 용기백배하다. 나는 3개교의 신학교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신학교가 있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착하고 젊고 뜻있는 사람들이 충분하지 않은가 어느 나라에나 훌륭하고 거룩한 성소자가 많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교 사회는 사제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언젠가는 사제직의 길을 다시 이해할 날이 오게 되도록 꼭 기도해야 한다. 사제단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여러분더러 젊은 사제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그 때문이다. 동정 성모 마리아께도 기도하라. 성모께서는 사제단의 모친이시며, 사제직의 모친이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성소의 은총을 주십사 하고 기도하라. 또 로마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그 혁혁한 빛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라.


 나에게 있어서 로마는 커다란 불가사의인 채로 있다. 로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가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확실히 로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중상도 비방도 아닌즉, 교회의 위기가 전 세계 전 국가로 퍼져 나갈진대, 그 총체적인 원인을 교회의 권좌에서 찾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로마에 관하여, 비정상적이고도 불길한 무엇가가 있음이 분명한데, 로마에서는 성총의 작용이 방해당하고 있으며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로마에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서 교회가 그토록 억압당하겠는가? 문제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그것을 느낄 수 있으며, 현대 로마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아직까지 나에게는, 로마에 있으면서 매일 꾸리아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로서, 서로 다른 신심단체의 사제들과 이야기 할 기회가 간간이 있다. 그 사람들이 몰래 털어놓기를, 항상 누군가 엿듣고 첩자노릇을 하며 보고하고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음으로 해서 로마가 억압당하고 바티칸 지역에 진정한 공포가 감돈다고 한다. 추기경들조차 모든 면의 바티칸 생활에 스며드는 지극히 악마적인 영향, 끔찍한 일에 면역되어 있지 못한 상태다.


 그런 악화는 무엇 때문인가? 그런 사악한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숨겨진 인물인가? 아니면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성직자들일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확실한 것은 그런 정신이 가톨릭교회의 권좌 뿐 아니라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스며들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의 현재 상태는 망설이지 말아야 하는, 혹은 두려워하지 말고 재편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끝을 맺으면서 특히 단결하는 것, 그리고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불화를 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해야 하겠다. 우리는 전통을 고수함과 더불어 그나마 깨달을 수 있는 성총을 조금 먼저 받은 극소수의 사람들이다. 우리가 거룩한 전통, 그야말로 성인들을 배출해 온 전통을 지키도록 허락 받은 것이 천주님의 성총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니 마음을 합쳐, 강력한 방벽을 더 잘 지키도록 힘을 모아 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여러분은 성총을 힘입어 힘닿는 대로 한결같이 계속해서, 그리고 자신 있게 뭐라도 해서 다른 이를 이끌어야 한다. 일을 하다 보면 여러분을 도와줄 교리문답 교사들을 꼭 마련해야 하겠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참된 가톨릭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전통적인 전례를 거행하며, 자녀를 강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우는 평신도 및 온전한 가톨릭 신자들이 운영하는, 나름대로의 학교를 조직하는 것도 극도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끝으로 영혼을 반드시 구해야 하니, 거룩한 우리 종교 및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상과 같은 조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니.  

http://www.sspxasia.com/Documents/Archbishop-Lefebvre/The-Holy-Sacrifice-of-the-Mass.htm

 (1975년 11월 캐나다 오타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