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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강론 5. 종도직에 뜻을 둔다는 것 (1991.2.8)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6-20



종도직에 뜻을 둔다는 것(1991.2.8)


 도구를 볼진대, 그 쓰임새가 다 같다고 생각할 사람은 정녕코 아무도 없으리라.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은혜가 다르기 때문이다. 좋으신 주님은 누구에게나 당신의 안배하심에 따라서 은혜를 내려 주셨다. 지능, 의지, 자질, 육신적인 것과 성격까지도…. 이상의 것들은 모두, 당신이 초자연적으로 활동하시기 위해 그리고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영혼 안에 주님의 생명, 초자연적인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데 이용하시는 천주님의 은혜들이다.


 주님은 그렇게 해서 우리를 이용하시니,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적인 사람, 더 선량한 의지가 있는 사람, 더 거룩한 사람…” 특히 거룩한 사람일수록 더 많이 이용되는 즉, 거룩할수록 더욱 더 천주님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사람, 즉 천주님의 뜻에 따라, 신성한 계획에 따라 진정으로 영혼을 구하는 일에 종사하려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온전히 천주님의 손 안에 있게 해야 한다. 천주님의 영향권에 맞서서 저항하면,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의지를 온전하게 천주님 뜻에 맞추지 않으면 천주님이 의도하신 바가 제대로 완성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많은 경우에, 천주님의 성총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시도하거나 또 초자연적이 아닌 방식에 따라 행동하려고 시도하면, 그렇게 하는 만큼, 천주님에게서 멀어진 상태에 있는 도구인 채로 생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최상의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 유념해야 하는 기본적인 수단은 주님께 그런 성총을 달라고 청하는 것인즉, 온갖 것을 주시며 우리 빛이요 길이요 거룩함이신 분, 천주님의 계획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시는 분, 즉 좋으신 주님이야말로 영혼 및 우리 각자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또 주님의 무엇을 원하시는지 더욱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성삼위에 관한 논문에서, 임마누엘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창조주를 인식하는 단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성의 빛에 의한 자연적 인식이요. 둘째는 신앙의 빛으로써 풍부해지는 초자연적 인식. 셋째는 천주님의 빛에 의한 지복직관의 단계이다.” 계속해서 그는 첫째 단계, 자연적인 인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자연적 인식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더 높이 올라 더욱 심오한 통찰의 차원에 이르도록 부름 받는다. 천주님에 대하여 초자연적으로 인식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빛에 의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인즉, 성 바오로께서 비유하시기를, 듣는 감각, ‘피데스 엑스 아우디투(Fides ex auditu)'에서 비롯된다고 하셨다. 신앙은 들음에서, 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아우디투스 아우뗌 뻬르 베루붐 크리스티(…auditus autem per verbum Christi).' 그로써, 당신의 본질 깊숙이 숨겨져 있는 놀라운 것을 천주님의 거룩하신 말씀께서 계시해 주시며, 창조의 본질에 대하여 비밀스럽게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까닭에 더욱 친밀한 방식으로 천주님을 인식하는 동시에 삼위일체를 흠숭하게 된다.” 참으로 기가 막히게 근사한 진리가 아닌가? 창조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천주님이 계획하신 구속의 본질인 동시에 영광스럽게 하는 본질이라!


 “… 실제로 우리 눈이 아직 가리워 있다고는 하지만, 단순토록 얽매여 있는 이해력일망정 최소한이나마 납득할 수 있는 까닭에 기뻐하는 가운데 그 설명을 듣는다.” 그토록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인식이란, 다른 것이 아닌 신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으니, 바로 그 안에서 싹트고 있음에 주목하라. 그런 이유로 이곳 현세에서 당신을 앎에 있어서. 할 수 있는 한 완벽하게 천주님 알기를 결코 단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 소경이라고는 하나 신앙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게 있으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되는 즉,


 “…신앙은 천주님 자신이신 진리 전체를 소유하는 것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신앙으로써 내비치어지는 신비는 현세적 생명 안에서는 이성의 능력을 초월함으로 인해 분명치 않은 가운데서도 빛이 너무나도 엄청나면 그 실체는 오히려 우리 육안에서 숨어 버리게 되는데, 신비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 신비는 도리어 또렷하다고 할 수 있다 (역자 주 -이는, 빛살이 너무 강하면 도리어 눈이 멀게 되거나 눈이 부시어 전혀 분간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음). 그런 이유로 해서 신비가 현세의 것 위에서건 영원한 것 위에서 놀라울 정도로 휘황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신앙이다. 정확히 말해서 신앙이란, 우리가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알아야 하는 것, 즉 현세의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해 인식 그리고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 빛이신 이는 당신이시니이다.ㅡ‘에고 숨 룩스 문디(Ego sum lux mundi).' '나는 이 세상에 오는 만인을 비추는 세상의 빛이니…’ㅡ‘퀴 일루미낫 옴넴 호미넴 베니엔뗌 인 홍크 문둠 (Quo illuminato omnem hominem venientem in huncmundum).' 참으로 주님은 우리 빛이시다. 천주님의 계획 전체 중에서 바로 당신이 의도하신 시기가 언제인지 다만 얼마간이라도 알려고 애써야 할 것이니. 우리는 엠마누엘 신부가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하는 한편으로, 그것은 성 토마스께서 가르쳐 주신 것과도 밀접하게 일치해야 한다. 엠마누엘 신부는 성세를 받지 못하고 죽는 유아의 행복에 관한 경우처럼, 성 토마스와 일치하지 않는 견해 한 가지 혹은 극소수의 다른 관점만을 빼고는 토미즘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매우 토미즘적인즉, 특히 신앙에 대해서 매우 그렇다. 그렇지만 성 바오로께서 신앙이 사라질 거라고 하시는가? 분명치 않다는 점에서는 사라질 것이 사실이지만, 지복직관의 빛 안에서는 도리어 활짝 꽃필 것이다. 성 토마스와 엠마누엘 신부 두 분에게는 같은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베일은 확실히 벗겨지고야 말 것이나, 성총과 신앙의 빛 안에서 이미 빛나고 있는 지성의 능력은 지복직관의 빛 안에서 꽃필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같은 얘기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천주를 알 방법이 없다. 천주님의 생각을 더 잘 알 안한 방법이 없다. 심지어는 알아내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주님에게 가까워질수록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 깊이 일치하게 되며, 천주님이 정신을 더욱 밝게 비추어 주신다. 이는 또, 그렇게나 많은 선업을 독자에게 베풀어 주었으며 아직도 계속해서 많은 선업을 베풀고 있는 저 훌륭한 소책자, 『종도직의 참된 정신』이라는 저서에서 동 쇼따르(Dom Chautard)가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강생과 구속은 온 인류에게 이르되 참섭하라고 불러들이는, 신적인 생명의 원천, 오직 하나인 원천으로서 예수님을 세워 드린다…. ”뻬르 도미눔 노스트룸 예숨 크리스툼, 뻬르 입숨 엣 꿈 입소 엣 인 입소(per Dominem nostrum Jesum Christem. Per Ipsum et cum Ipso et in Ipso).' 교회의 본질적인 행위는 성사, 기도, 강론 및 그들에 결합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선업을 통하여 성총을 퍼뜨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주님이 당신 성자를 빼놓고 하시는 일이란 도무지 하나도 없다. ‘옴니아 뻬르 입숨 팍타 순트 엣 시네 입소 팍툼 에스트니힐(Omnia per Ipsum facta sunt et sine Ipso factum estnihil).' 자연적 질서 안에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서로가 공유하는 천주님의 내적 생명인 동시에 천주님의 자녀가 되어 참섭할 수 있게 하시는 당신 자신의 본성일진대, 초자연적인 질서 안에서는 얼마나 더 하리요.

 ‘베니 웃 비땀 하베안뜨(Veni ut vutam habeant) ㅡ나는 그들이 생명을 갖도록 왔노라…’ ‘인 입소 비따(In ipso vita eratㅡ당신 안에 생명이 있었다…)’ ‘에고 숨 비따(Ego sum vuta…ㅡ나는 생명이다…)’


 정말로 명쾌하기 그지없는 말씀들이 아닌가. 주재자께서 이 진리를 실마리로 삼아 풀어주신 넝쿨과 가지의 비유에서 얼마나 많은 빛이 발견되는가! 예수님 당신만이 홀로 생명이신즉, 결국 종도들이 그 생명을 공유하고 또 다른 이에게 전달하려면 천주님이시면서 사림이신 분께 접목되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얼마나 많은 주장으로써 종도들의 전신에 새겨 주시느냐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엠마누엘 신부가 ‘이단적인 일’에 대해 묘사한 것을 보면, 메리미요 추기경(Card. Mermillod)이 묘사했음직한 것에 비할 만하다.


 “이단적인 일이란 천주님이 활동하셔야 할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열광적인 활동ㅡ성총을 멸시함ㅡ예수님의 관을 벗기려는 인간적인 교만이다. 그것은 초자연적 생명, 기도의 힘, 구속의 질서의 지위에 대해 취급하기를, 겨우 추상적인 활동의 영역으로 격하시키는 정도에서 그친다. 이는, 금세기 자연주의의 시기에 다른 각도에서일망정, 영혼에 대하여 결코 비현실적이지만은 않은 연구가 매우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에 속한다. 인간에게는 특히 외형을 보고 판단하는 속성이 있어서 일의 성공이란 것이 마치 우선적으로 능숙한 조직력에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상으로써 신앙, 천주님 안에서의 신앙, 성삼위일체 안에서의 신앙, 종도직 안에서 생활하는 분위기가 되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육신의 일로써 조성된 일을 조직하는 것을 참아 견딘답시고 그저 내버려두는 식으로 하여 종도직 안에서 생활하는 분위기를 버린다면, 우리 일의 초자연적인 측면은 조금씩 점차적으로 사라질 것이 뻔하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성직자로서, 관료주의자라고나 해야 알맞을 성싶은 성직자가 되고 만다. 다름 아닌 관료주의자인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국가의 관료 노릇은 해도 괜찮지만 교회의 관료는 될 수 없을진대. 그럼에도 우리가 교회의 관료 노릇을 하여,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한답시고 조직에 조직을 거듭한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 성직자 및 일반 성직자가 붕괴된 것이 아닌가.


(르페브로 대주교님의 마지막 영신 담화. 에콘. 199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