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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강론 6. 천주님의 권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6-29



천주님의 권리

스위스의 에콘, 성 비오 10세 신학교의 신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나는 믿나이다”
 

공의회 및 그 이후의 자유주의가 계속해서 진전되도록 그냥 놔둘 수가 없었기에 작년에 몇 가지 예를 들었었다. 거기서 말하기를, 공의회 문헌을 보면 자유주의 오류가 그저 조짐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녹아 있다면서 주의를 환기시킨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종교의 자유, 에큐메니즘에 관한개요와 현대세계헌장(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에 매우 애매한 표현이 들어 있는데, 그것들은 불행히도 그런 표현으로써 오류에 자리를 내어주는 바람에 교회 안에 오류가 퍼지는 계기가 된 받아들일 수 없는 정신, 자유주의 정신으로 채워져 있다.


 어떤 자유주의든 교회법으로써 허락된 적이라곤 도무지 없으니, 교회법으로써 자유주의를 허용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보는 바이며, 그 이유는 교황들이 비난한 자유주의 태도, 자유주의 오류에는 근본적으로 신덕이 결핍되어 있는 연고이다.


 성인(聖人)이 지녀야 할 첫째 덕목은 바로 신덕으로 온전한 영성생활의 기본, 다른 온갖 덕행의 근본이다. 치유해 달라거나 진리를 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우리 주님이 요구하신 것이 바로 신덕이다. 당신께서는 우선, 믿느냐고 물으신다. 어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자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나중에 메시아를 믿느냐고 주님이 물으시자, 소경은 메시아이신 주님께 여쭈었고 구세주께서 대답하셨다, “너에게 말하는 자가 그로라.” 거룩한 복음에 따르면 그 순간에 소경이 답하기를, “나는 믿나이다”라고 하고는 땅에 엎디어 천주 성자를 흠숭하지 않았던가.


 주님은 언제나 신덕을 요구하시는 즉, 신덕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라는 오류에는, 정확히 말해서 진정한 천주님이신 그분, 우리 주님이신 그분, 우리 주님의 왕권, 특히 주님의 사회 통치권에 대한 신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자유주의자는 주님의 사회 통치권을 제한하려 한다. 그런 자는 천주경, “네 나라이 임하시며, 네 거룩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룸 같이 땅에서 또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때면, 주님이 암송하라고 하신 것을 실제로는 거짓으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원수는 천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룸 같이 땅에서 또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 드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즉―될 수 있는 대로 진리를 많이 제한하려 든다.


 정교(政敎)분리
 

예컨대, 정교분리라는 관념을 보자. 그것은 순전히 우리 주님이 나라를 지배하시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저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 가톨릭이 국교이어야 한다고 하는 경우에는, 주님이 국가의 왕이어야 한다는 것 말고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라의 왕이시다. 왕이신 당신은 입법자이신 동시에 판관이시다. 그런 나라를 보면 모든 법정에 십자고상이 있다. 왜 그런가? 주님을 왕으로 모시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게 하면 다른 종교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종교라니 어떤 것이 있다는 말인가? 주님께 다른 것이란 도무지 없는데. 다른 것이란 아무 것도 없으며 있다면 악마의 종교인 즉, 악마의 정신만이 있을 뿐이다. 자, 주님과 악마를 똑같은 수준에 두려는가?


주님을 악마와 비교할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인가? 궁극적으로 보면, 저 다른 종교들은 인간을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종교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그릇된 종교에 불과하다. 종교,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자모이신 성교회, 우리 주님이 세우신 로마 가톨릭 교회이다. 당신의 미사성제와 칠성사이며, 그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 프로테스탄트는 미사성제를 믿지도 않는데다가 신성모독이라고까지 한다. 자, 그것은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과 정반대이니, 결국 그리스도교의 밖에 있는 셈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에게는 프로테스탄트 및 다른 종교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할 권한이 없음은 뻔한 이치다. 그런데도 정교분리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들 한다. 예컨대, 스위스의 발레(Valais)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자. 정교분리를 이룬다 하여 국가가 가톨릭 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즉 다른 아무 종교에게든지 동등한 권한을 준다고 해서 종교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우기는 자들이 과연 가톨릭인일까? 비가톨릭인이 그렇게들 말한다.


가톨릭의 사목활동
 

가톨릭제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묵인하고 있는, 예컨대 국민 전체가 회교도인 국가, 모리타니아에서와 같이 회교가 주인이 되어 지배하는 회교국에서는 아주 다르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거기서는 가톨릭 주교 한 사람과 사제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묵인하고 있기는 하지만, 유난스럽게 눈에 띄지 말아야 하고 회교도를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키려 하지 말아야 한다. 가톨릭의 사목활동은 처음부터 가톨릭 신자인 사람 혹은 외국인에 대해서만 행해야 하며, 그것도 회교 학교에 다니고 있는 이들을 개종시키려는 일은 애시 당초에 생각도 못하게 한다.


 그렇게 하면 회교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가톨릭인을 즉시 쫓아내 버리고 만다. 그러니 그런 국가에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첫 걸음이란 가톨릭도 회교와 같은 권한을 가지 수 있게 되도록, 느리지만 확실하게 조금씩이나마 점차적으로 가톨릭교회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발전할 수 있도록 모든 종교의 자유를 달라고 정부에 요청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물어볼 것도 없이, 그럼 가톨릭인이 비가톨릭국에게는 모든 종교를 위한 자유를 달라고 요청하면서도 가톨릭 국가인 경우 프로테스탄트에게는 모든 종교의 자유를 주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을 터인즉, 가톨릭교회야말로 참교회이고 가톨릭 종교야말로 참된 종교이며 오로지 진리에게만 마땅한 권리가 오류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회교국을 상대로 종교의 자유를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 그것은 저들의 종교가 참되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특정 국가에서는 우선 참된 종교 (가톨릭)를 발전시킬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좋으신 천주님이 허락해 주시는 날, 가톨릭이 그런 특정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가 된다면 그때에는 가톨릭이 국교가 될 수 있으니, 이는 천주교가 하나인 동시에 오직 하나뿐인 참 종교인 연고이다. 그 문제에 관하여 다른 해법이 필요 없다.


혹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고 할 것이나, 한편으로 어느 한 종교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다른 편으로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런데 우리는 오류가 어디에 있건 늘 배격해야 하고 또 진리, 즉 우리 주님이 승리하시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에 우리에게는 사사로운 기준에 근거를 두어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진리를 의심하는 것이고, 장차 회교도를 포함하여 온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천주님의 영광을 의심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군림하시리라! 신앙이 없는 이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당신의 권리를 한정시키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를 믿음은 곧 도덕의 자유를 믿는 것이므로 결국에는 이혼의 자유, 피임의 자유, 낙태의 자유, 안락사의 자유, 모든 것의 자유를 믿게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같이 작용한다.


 그것들의 자유란 주님의 통치권을 방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어떻게 해서든 주님이 보호하시려는 것은 가정의 도덕률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관하여 주님이 준엄하고도 단호한 계명을 내려 주시지 않았는가.


 신앙에 대한 의심
 

 이제 신앙에 대한 의심을 살펴보면,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참된 신앙이 없다. 그들에게는 순전히 입술만의 신앙, 가짜 신앙만이 있다. “이 자들이 입술로만 나를 공경하는도다.”라고 우리 주께서 말씀하셨다. 저들에게는 신앙이 없으니 믿지 않는 셈이다. 자유주의자의 경우를 보면 그렇다. 저들은 언제나 가톨릭을 말하고 찬미한다지만 깊숙한 곳에서는 기반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미사에도 가고 주임 사제와 잘 지내며 돈도 주고 필요한 도움까지도 준다고 하지만, 정책적인 부분에 이르면 늘 교회를 반대하는 쪽으로 투표를 한다. 정부의 차원에 이르면 언제나 프리메이슨,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온통 교회에 맞서 싸우는 자들하고만 합심해서는 교회의 원수와 같은 편을 들곤 한다. 저들은 배반자, 교회 내부에서의 배반자이다. 말하기가 슬픈 일이지만, 최근에는 이런 배교자들이 교회 도처에 깔려있다.


 교회는 주교들로부터도 배반당하고 있다. 부인하지 못할 사실인즉,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교분리에 찬성하는 투표를 하도록 권면하는 상황에 이르는 정도가 되면 내 보기에 그것은 배교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가톨릭이었던 정부가 협약을 있는 대로 다 개정하여 비종교적 도덕론자, 성직 겸임자가 되고 또 모든 종교에 대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을진대, 이것이야말로 배교가 아니고 또 무엇인가?


 모든 종교를 찬성하는 상태에서 종교 하나를 취향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유주의자라면 어떤 종교든지 다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무슨 종교든지 다 좋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바로 천주님의 영광을 침범하는 크나큰 오류인즉, 천주님은 당신의 영광에 관한 한 질투가 많은 분이시다. 우리는 항상, “영광이 부와 자와 성신께(Gloria Patri, et Filio, et Spirirui Sancto-글로리아 빠뜨리, 엣 필리오, 엣 스피리투이 상또)”와 “실로 합당하고 가하도소이다(vere dignum et justm est-배레 디늄 엣 유스뚬 에스트)”라고 기도하는데 천주님이신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은 참으로 지당하고 온전하며 의로운 일이다. 가장 위대하셔야 하고 가장 아름다우셔야 하며 가장 고귀하옵신 천주님의 영광에 대하여 질투가 많으신 것이다. “너희는 다른 이에게 영광을 드리지 말지니라”고 성영에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다른 이에게 영광을 돌리지 말라”고 말이다. 천주님의 영광을, 그것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잡신에게 돌리지 말라는 것이니, 아니된다. 마호메드에게 주어서도 안 되고, 루터에게도, 부처에게도, 그 밖의 다른 것에 주어서도 아니 된다.


 그 이유는, 천주님의 영광은 오직 천주께만 속해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의 영광, 구세주이신 분의 영광, 우리 모두에 대한 최고 판관이신 분의 영광, 이 영광을 지니신 분 은 그분 홀로이시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분의 영광을 감소시킬 권리가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이어야 할 것이니, 교회를 거슬러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천주께만 합당한 천주님의 영광을 도적질하여 줄이는 자인즉, 온 인류가 드리는 영광과 흠숭은 오직 창조주만이 받으실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참된 교리를 지니고 그 참된 교리를 알고 굳이 지켜 흔들림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이는 저자 루셀 신부님(Abbé Roussel)이 자유주의 가톨리시즘의 구제책(The Remedies for Liberal Catholicism)이라는 저서에서 “인간이라면 특별히 참다운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진리를 발견하는 지혜, 무엇보다도 철학에서의 지혜, 그리고 더욱 특별히 자연적 수준에서 최고의지혜인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참된 지혜이다. 천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철학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추상적인, 매우 추상적인 사변철학으로 인해 다소 어렵다고 느끼겠지만, 그렇더라도 그 모든 철학이 천주께 관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존재’를 공부하면, 즉 존재를 분류하다 보면, 자연이성 신학, 말하자면 존재, 생활한 존재, 존재의 근원에 관한 연구로부터 “나는 곧 있는 자로다”라고 하신 지고의 존재이신 분에 관한 연구에 이르게 된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무엇이라 말해야 하리이까?”라고 모세가 천주께 여쭌 즉―“내 이름은, 나는 곧 있는 자로다”, 그러니 나란, 내 안에 존재로 채워져 있는 자를 말한다.


 천주님의 권리
 

 다음 문제를 생각해 보자. 나 자신의 본질로 말미암아 ­ ens a se(엔스 아 세),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다른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즉 압 알리오(ab alio)가 아닌 나는 내 안에 존재로 채워져 있는 자이다. 스스로 존재함, 스스로 존재케 함, 그리하여 영원히 살아서 영원함, 이는 너무나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이어서 몇 시간이고 묵상할 수 있다. 스스로 존재케 하시는 그분은 결코 떠나신 적이 없으시며 항상 계시고 항상 계실 것이며 항상 계셔 오신 반면에, 압 알리오(ab alio)는 정해진 때에 시작되었다. 그는 스스로 존재케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로부터 존재성을 부여받고, 그리하여 비로소 시작이 있게 된다. “나는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단 한 가지 사실, 그 반면에 천주께서는 결코 존재하기 시작한 적이 없으시므로 무시지시에 나심―그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는가? 또 천주께로부터 존재성을 부여받은, 이렇듯 하잘 것 없이 미약한 존재인 압 알리오(ab alio)에게 천주님의 영광에 제한을 가하여 국가적으로 천주께 영광을 돌리거나 돌리지 못하게 할 권리가 있는가?


 이상과 같은 고찰 ― 천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 그분의 전능하심, 그분의 속성, 간단히 말해서 자연이성 신학 ― 이는 철학이다. 윤리법 전반에는 그분이 누구이신가에 관한 법, 우리 안에 불어넣어져서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사랑이신 천주님의 사랑의 법, 천주님의 법을 제공하는 윤리학들이 딸려 있다. 자연법 및 실정법, 천주님의 실정법, 교회의 실정법, 시민의 실정법 모두 천주께로부터 비롯된 위대한 사랑의 법에 해당하는데, 천주님의 법은 사랑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것들이 다 매우 중요하다는 것 또 하잘 것 없이 미약한 존재인 우리가 얼마나 유한한지를 더 잘 이해하려면 훌륭한 철학적 뒷받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라 함은, 우리가 질료에 결합되어있음을 생각할진대, 그 질료란 우리 존재성을 한정시키는 요소이고 모든 천신들은 독립된 종(種)인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인 동시에 같은 종의 구성원에 지나지 않아서 사람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오로지 하나의 종만을 구성함으로 해서 같은 종에 속한 한낱 개인에 지나지 않음을 고려하면, 우리 존재성은 하나 하나 쪼개져서 개별화된 것이다. 이는 우리가 미소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무엇인가? 전능하신 천주대전에서 그저 미소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즉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 줄 뿐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옵니다. 천주대전에서 나는 무(無)이옵니다.”


 사실 그렇다. 그 문제에 관해 생각하고 숙고하고 철학을 많이 공부할수록 이 진리에 더욱 파묻혀, 천주대전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더욱 더 인식하게 되리라. 천주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리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머리카락 한 올도 땅에 떨어지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천주님만이 모든 존재성을 지탱하고 계셔서 우리에게도 그 존재성을 지속적으로 부여해 주시니, 그 이유는 우리가 잉태되는 순간에 그분께서 존재성을 허락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지금도 그것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 존재성은 끝장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지지, 즉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존재성을 철회하시면 우리는 사라져 버려 더 이상 존재치 못하게 된다. 회교도, 불교도, 당신의 원수들도―모두 존재성에 있어서는 천주님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크신 자비로써 유지되는 것이다. 또 저 모든 사람들이 천주님을 진실로 흠숭하지 않는 것은 곧 그분을 거스르는 것임을 생각하라. 천주께서는 저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떨어지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저들이 당신을 향한 사랑의 송가, 애덕송을 바치기를, 그리하여 훗날 당신을 알고 사랑하여 당신의 영광에 참섭하기를 항상 바라고 계신다.


 본성과 성총


 자 이 모두가 순수철학이며, 신학에 까지 나아가면 신덕에 이르게 되고 본성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더불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총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깨달게 되며, 또 성총은 본성을 무한히 초월하는 것이어서 거기서는 도무지 서로를 비교할 수 없다. 왜 서로를 비교할 수 없나? 성총으로써 천주성에 참섭하고, 성삼위이신 천주님의 존재성에 참섭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신 사이의 친밀한 생활에 참섭하기 때문이다. 무한히 좋으신 우리 천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천주성에 참섭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전능하신 천주께서 불쌍한 피조물인 우리, 무의미한 존재인 우리, 한 줌 먼지에 불과한 우리가 당신 자신의 친밀한 사랑, 당신, 즉 성부와 성자와 성신을 결합시키는 그 친밀한 사랑의 본성에 참섭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는 우리 상상력, 정신, 지성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이해하기를 바랄 수조차 없는 것들이지만, 그렇더라도 묵상에 잠겨 천주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들이다.
 
 천주님에 대한 신앙, 우리 주님에 대한 신앙이 있다면, 당신의 뒷받침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바로 프로테스탄트 혹은 우리 학교에 다니는 유데아인을 괴롭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유로 해서, 현세에서 주님의 권리가 없다거나 혹은 벽에 십자고상을 걸면 안 된다고 하는 일이 어찌 가능한 것인가? 다른 이를 곤혹스럽게 하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가면서 비천한 피조물인 우리가 감히 십자고상을 달아서는 안 된다는 무례를 저지르지만 유데아인 역시 천주님의 피조물이 아닌가? 저들은 주님 왕국의 국경을 정할 권한이 잇ㄱ라도 하다는 듯이 천주님을 제한하고는 그에 따라서 아주 당연히 사제 혹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생활이 당신의 통치권을 향하기는 하되, 우리가 당신의 왕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왕국이 우리가 행하는 것 안에, 다른 이 안에, 우리 안에 속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틀림없이 그렇게들 믿고 있다.


 이렇게 해서 철학이 매우 중요하고 또 2년 도안 사색하기만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그저 괴로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천주께 감사 – 데오 그라시아 Deo Gratias – 생명을 초월한 것인 신학을 말하자면 더욱 실질적이고 사실적인즉, 다음에 열거하는 것들은 오류다. 도처에 깔려있는 현대의 온갖 오류, 진화론에 관련된 온갖 오류, 주관론에 관련된 온갖 오류, 실존주의의 온갖 오류,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이 모든 문제는 신학이 아닌 올바른 철학만으로도 해결될 수 있다. 이 모든 오류를 녹여 없애는 것은 철학, 특히 윤리학이다. 철학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철학이 없다면 신학 특히 성 토마스의 신학이라는 초자연적 지식의 바탕을 이루는, 사물의 자연적 질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


 법과 질서
 

 비오 11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우리가 혼돈 속에 빠져 살고 있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인간이 법문화를 거부하고 천주님이신 창조주, 즉 세상의 주재자를 권위와 법의 근원으로 여기기를 거부하면서 시작된 상황, 말하자면 권위에 맞서 극렬하게 공격함과 동시에 존중하지 않으려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언제부턴가 법이 사람들로부터, 다수로부터 왔음으로 이법의 권한이 다수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종말이 시작되었으며 그리고는 잠깐 사이에 프랑스나 아프리카 사이에서 혹은 그 밖의 곳에서 다수가 낙태를 찬성하게 되었다. 낙태를 허용할 수 있다는 법이 제정되는 바람에 그것에 관하여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다수에게 천주께서 직접 입법해 놓으신 건에 관하여 새로 법을 정할 권한이 잇는가? 우리 주님이 직접 입법하신 이혼에 관한 사항을 정부가 규정함에 있어서 다수에게 달려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로 떨어질 천주님으로부터의 저주, 징벌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즉, 하지만 그런 전쟁에서는 악하고 유해한 자들만 고통을 겪는 게 아니라, 착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바로 불행한 일이다.


 언젠가 내가 거주했던 로마에 있는 리투아니아인의 별장에서 보내온 리투아니아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후로 아직도 계속해서 소책자를 받아보고 있다. 그 기사는 지금 리투아니아에서 박해받고 있는 천주님의 권리에 관한 것으로, 1972년부터 소비에트는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놀라운 일은 그 사람들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베리아로 추방하는 일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모든 주교를 실제로 억압하고 사제들을 추방하며 신학교를 폐쇄시켰고 10년 전에 허가했던 것을 모두 철회함과 동시에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한다. 누군가 자기 아기에게 세를 줄라치면, 근 시베리아로 당장에 쫓겨날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놀랍고도 절망적이어서 그런 집중 수용소라는 것이 계속되고 잇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지 않는가! 손을 떨리게 하는 공포, 슬픔, 그리고 그 모든 게 다 그들의 신앙 때문이다. 이는 우리 신앙을 감소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굳게 지키도록 고무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