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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강론 7. 사랑이란 (1994.10월)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7-12



르페브르 대주교의 강론


7. 사랑이란 (1994.10월)


 남을 헐뜯기를 일삼는 자들은 대주교님이 교만으로 차 있었다고들 하지만, 그분이 자모이신 성교회를 보호한 것을 보면 실제로는 영웅적인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코린토인에게 보내신 제1차 서간 중에서 제 13장을 보면, 성 바오로께서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매우 잘 표현하고 계시다.


 사랑을 취급하되 쉽사리 진리의 덕(德)에 비해 덜 사내다운 덕으로 보는 까닭에,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속아 넘어가기 일쑤다. 그러나 사랑은 신성한 덕, 천주님의 덕, 천주님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류다. 천주님은 사랑이시다. 천주께서 굳셈의 덕이 못되신다는 것일까? 본질적으로 사랑이신 약하시다는 것일까?


 사랑은 필수덕이다. 그 같은 사실을 사람이 멋대로 바꾸지 못하는 즉, 성삼위의 법칙인 동시에 사람이란 모름지기 천주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존재하는 것 모두의 법칙이다. 천주님이 사랑이시라면, 모든 게 사랑이고 그 살랑은 천주께서 피조물 안에 안배해 놓으신 성향으로써 증명된다.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수마 테올로지카ㅡSumma Theologica)의 첫 번째 문제에서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 ㅡ 텐데레 인 데윰(tendere in Deum)이 무엇인지 설명해 준다. 인간의 마음속 깊이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심오한 법칙은 천주께로 향하는 성향이다. 정확히 말해서. 천주께로 향하는 성향이 사랑인 것이다. 성삼위일체의 삼위께서 서로 향해 계시면서, 상호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에 대해 한도 끝도 없이 포기하는 방식으로 오직 하나인 일체를 이루고 계시는데, 그렇기 때문에 성삼위 일체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용어는 바로 사랑이다. 성삼위일체를 본받아서 우리 자신을 본성 및 좋으신 주님이 허락해 주시는 성총에 순응시키고자 한다며, 자신을 사랑 안에 완전히 몰입시켜야 한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좋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하시는 유일한 방법이다.


 성 바오로(고린도 전서 13장)의 서간경을 읽어 보건대, 성경에서 요청하는 방식대로 사랑을 실천하려면 큰 노력을 기울이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설령 사람과 천신의 온갖 언어의 특은을 가져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을진대 울리는 구리나 소리 나는 괭과리에 지나지 않으리라”(1절). 사람뿐만 아니라 천신의 온갖 언어라! 이를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제 아무리 훌륭하게 표현한다 해도 (친절하고 아첨어린 말로써 자신의 이기주의를 그럴 듯하게 포장함으로써), 사람의 능력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뜻한다.


 “또 나 건설적 설교의 특은을 가지고, 모든 신비를 알고 온갖 인식을 가질지라도, 또 나 서 설령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신앙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을진대 아무것도 아니로다.”(2절).


 이 부분은 어마어마한 부분이다. 천주님에 관한 많은 신비가 천주님 안에, 본성 안에, 모든 곳에 또 우리 자신 안에 어떤 식으로 있는지를 알고 ‘온갖 인식’, 즉 인간에 관한 지식 및 심지어는 천주님에 관한 지식까지도 지나며, “또 설령 나 완전한 신앙이 있다 할지라도”, 즉 신앙은 초자연적 지식, 천주님에 관한 지식이므로 신학상의 지식이다.


 이상과 같은 성 바오로의 단언은 요긴한 것인즉,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아무리 선한 것, 나아가 아무리 범상치 않은 것이라도 성총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일구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로부터는 어떤 공로도 끌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사랑의 행위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의 착한 행동에 관한 경우에 해당된다. 성총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로 착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부인하지는 않으나, 공로의 관점에서는 가치가 없다. 회두케 하신 다음에는 상존성총을 허락하시기 위한 조력성총을 주심에 있어서, 주님이 그 착한 행동을 고려하실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또한 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내 몸을 불사름에 붙인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을진대 내게 아무 유익도 없으리라”(3절). 그러므로 우리 안에 천주님의 성총이 없으면, 좋으신 주께서 성총을 불어 넣어주심으로써 허락해 주신 그 초자연적인 사랑이 없으면 모두 다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가? 그 모양새는 어떤 것인가?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랑은 관인하고 (라틴어로는 인내한다고 한다), 어질도다 (이를테면 겸손하다)”(4절). 이는 어쩌면 사랑을 어느 정도 나약해 보이게 하는 요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즉, 사랑이 깊어지면ㅡ그저 겉으로만 보이는 것만을 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겪어도 방해받지 아니하고 관인한다. 관인한다 함은 곤경, 곧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함을 뜻한다.


 흥미가 없는 것 혹은 일치할 수 없는 것 심지어는 고통스러운 것마저도 기꺼이 껴안는다는 의미에서 친절하다. 사랑에는 듣는 법을 알고 다른 이의 시련을 함께 나누어 받는 법을 아는 겸손이 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고”(4절). 자기에게는 없는 좋은 것이 다른 이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도, 다른 이가 받은 그런 은혜에 대해 질투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


 혹여 다른 이들에게 있는 덕이 자기에게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랄 수 있겠지만 어쩌면 나중에라도 결코 지나지 못할 수도 있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다른 이와 똑같아지도록 혹은 사람들이 그 다른 이를 덜 열등하다고 여기게 하고자 하여 깎아내리는 것을 결코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4절). 말하자면, 실제로는 헛되고 헛된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그 자체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사랑은, 아는 체하지 않는 것이 천주님의 뜻임을 깨닫고 나면 결코 아는 체하지 않는다.


 “사랑은 거만하지 아니하고”(4절). 교만하지 않고 득의양양해 하지 않으며, 혹여 자신에게 은혜가 주어졌더라도 쓸데없이 내보이려 하지 않고 다른 이를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은 무례하지 아니하고”(5절). 거창하지 않으며, 마땅히 그럴 만한 자격이 실제로 있더라도 특별히 인정받으려 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익을 도모하지 아니하며”(5절). 이기주의자와 반대인즉, 이것이야말로 사랑에 대한 참된 정의(定義)다.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지 않고 천주님과 이웃의 이익을 추구한다. 물론, 천주님의 이익을 열심히 찾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익이기는 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구원임을 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기주의를 만족시킬 요량으로 그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성 토마스는 말씀하시기를, 사랑에는 퍼져 나가 감화케 하는 성향이 있는 선(善)을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내어 주려는 욕구가 있다고 하신다. 어느 면으로 보면, 생명을 주는 것과 동일하지 않는가. 유데아인들이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성 베드로께서 유데아인에게 설교하시기를 “그대들은 생명의 창조주를 죽였도다.”라고 했다.


 생명의 창조주를 어떻게 죽일 수 있었으랴마는, 그들은 분명코 그분을 죽였고 그분은 다시 일어나셨다. 자기가 직접 생명의 창조주이신 당신은 도무지 생명을 잃으실 수 없는데도 그렇게 하셨다. 또 사랑으로써 사익을 도모하지 않아야 천주님의 권리를 세우는 것이다. 자연적 생명이건 초자연적 생명이건 간에 생명을 주는 만큼의 권한이 있다.


 “사랑은 노하지 아니하고”(5절).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각자의 기질을 잃게 되는 경우도 많고, 거룩한 분노도 틀림없이 있기는 하다. 우리 주님은, 장사꾼들이 성전 안에 있지 말아야 하는데도 성전에 있는 것을 보시고는 대노하셨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에 관하여 악한 기분을 지속시키는 내적인 격노, 내적으로 극심한 분노 상태에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일이다.


 “사랑은 당한 욕을 기억하지 아니하며”(5절). 사랑은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 아무 증거도 없이 자기 판단을, 함께 생활하는 다른 이에게 갖다 붙이는 것은 가장 무거운 죄 중의 하나다! 결코 신중하게 고려하지도 않은 생각을 다른 이에게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모종의 행동으로 말미암은 해악을 샅샅이 알려면, 죽은 후에야 이루어질지니 지레짐작으로 섣부르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영혼이 병들었다고 여겨지더라도 진실이 드러나 다른 식으로 증명이 될 때까지는, 의심스러운 점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그들을 회두케 하는 것 말고 더 좋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혹자는 악행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순진하다면서 반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악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순진한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하는 편에 속한다.


 “사랑은 불의를 즐기지 아니하고”(6절). 사랑은 영혼을 죄에서 끌어내고자 하여 위해 동정하고 또 노력한다. 방황하는 이를 위해 애써 기도해 주려하며 누군가 그를 속이는 것을 보면 속상해 한다.


 종도 바오로는 사람의 속성을 나열하되 다음의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은 불의를 즐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진실을 즐기며”(고린도 전 13:4,6). 다른 이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란 그를 진리에게로 데려가는 것이다. 실제로 성 토마스는 친절에 대해. “다른 이 안에 천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여, 그들을 천주께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친절은 또 천주께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이 그들 안에 있으면 훈계하는 것과, 천주님과는 도무지 상관도 없는 것이 그들 안에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사랑하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진리는 천주님 자신인즉 우선, 천주께서 계시해 주신 것으로 이루어진 진리를 함께 나누는 이들을 기뻐해야 한다. 우리 지성은 신앙을 통해 그 계시에 결합되어 있어야 하며 바로 그런 사실로 인해, 교회의 가르침에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가르침을 포함하는 교정권은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가르침을 포함하는 교정권은 트리덴틴 공의회에 의한 교리문답 및 그 뒤를 있는 모든 교리문답에서부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구체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그 교리문답들은 성격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종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성전(聖傳)을 통해서 주어진 게시를 요약하고 있으니, 성경에만 모든 진리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 오류가 아닐 수 없다.


 계시는 종도들에게서 종결되었으나, 종도들은 기록되지 않은 것들로 가르침으로 해서, 계시가 성경에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며, 성경 및 성전으로부터 비롯된 일련의 가르침이 교리문답에 있으므로, 신자가 교리문답에 있는 가르침에서 벗어나게 되면 천주께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 옴니아 수페르트(omnia suffert)ㅡ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7절). 주님은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불사하실 정도로 온갖 것을 겪으셨기에 사랑은 십자가상에 계신 우리 주님과 결합하여 무엇이든지ㅡ모든 손해, 모든 수치, 그리고 모든 반대를 견디게 한다. “누가 그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 15:13).


 성 바오로께서 고린도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랑은 모든 것 심지어는 인류의 구원 및 천주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을 정도로 참는다고 하신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 옴니아 크레디트(omnia credit)ㅡ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7절). 종도 바오로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씀 하시는 즉, 사랑에 따른 첫 반응은 믿는 것임을 뜻한다. 이는 내가 이미 성급한 판단을 하는 것에 관해 말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랑에 따른 최초의 반응은 다른 이들이 실수한 것이 아니라고 또 그들이 말하는 것이 정확하고 진실하다고 믿는 것으로서, 신앙에 반대되는 것을 믿는 것과는 다르다.


 위의 구절(고린도 전 13:6)에서 성 바오로는 “진실을 즐긴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사제가 가르치는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혹은 오늘날의 발현주의 영상 및 메시지에서 전달하는 것이라면 모두 다 쉽게 믿는 것과 같이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되며, 믿고 싶어 하는 그릇된 자발성마저 가져서도 아니 된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결단코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


 “… 옴니아 스페랏(omnia sperat)ㅡ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고”(7절). 참된 사랑은 천주님, 모든 착함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분 안에서 바라므로 항상 모든 어려움, 장애, 그리고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라기만 한다. 그러므로 방법만 확실하다면 그 안에서는 사랑이 빗나갈 리가 없다.


 “인 떼, 도미네, 스페라비: 논 콘푼다르 인 아에떼르늄(In te, Domine, speravi: non confundar in aeternum)." 우리는 떼 데윰(Te Deum)에서 이상과 같이 노래한다(오, 주여, 내가 당신께 신뢰하였을진대, 영원히 나를 당황치 말게 하소서).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고 틀린 것에는 그릇된 희망을 두지 않으니 진리, 선함, 다른 이의 안녕, 그리고 천주님의 영광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즉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가까운 장래에 천주님 안에서 그 소망이 채워지리라고 확신함으로 인해서, 사랑은 소망하고 그렇게 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 옴니아 수스티넷(omnia sustinet)ㅡ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는 도다”(7절). 사랑은 선과 일치하는 것이면 다 복돋워 주며, 굳셈이시고 버팀목이신 천주께 의뢰하므로 항상 낙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그런 측면은 사회생활을 무척이나 수월하게 한다.


 그러나 사랑은 희생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지니. 인간이 득죄하였으므로 그리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가 파괴되었으므로 사랑으로 이끄는 길은 희생과 보속의 길이다. 보속은 수단인 반면 사랑을 목표인즉,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는 해도 천주님의 성총을 통해서 주신 신성한 생명인 사랑을 이루려면 우리 안에 남아있는 장애들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십자가와 보속이 없이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우리 안에 장애가 있게 된 원인은 타락(첫 범죄)이 있은 후에 우리는 그것들을 간직한 채 태어나므로, 그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란 게 도무지 없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자신에게서 그것들을 제거해야 하며 보속을 행하고 희생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그런 장애들은 건강해지려면 부위를 도려내서 제대로 치료받아야만 하는 종기와도 같다.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표양으로써 알 수 있듯이 고통, 보속, 그리고 고행이 없이 사랑이 커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속이란 분명히 매력적이지 못한 까닭에 그것을 이해하기란 극히 불가능하다. 사랑은 끌어당김에 반하여 보속, 고통을 당함, 고행, 그리고 십자가는 즐겁지 않다.


 그러나 사랑이 정말로 커지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결합시키기를 원하게 되면, 당신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당하려는 소망이 생긴다.


 모든 성인들께는, 그저 우리 주님이 고통을 당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통을 당함, 보속,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죄가 없으시고 성신으로 채워져 계신 ㅡ 그래서 사랑으로 채워져 계신 ㅡ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우리 주님과 일치된 성정으로써 고통을 당하여 우리 주님을 더욱 닮고자 하셨다.


 그러니 성인들의 영혼은 보속을 통해서 사랑을 채울 수 있었음에 틀림없으니, 이는 영적인 생활에 관한 것인즉, 사랑이 커지고 싶다는 소망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상에 대해서는 절대로 잘못 생각하지 말지니.

 또 의롭다고 인정되는 점에 있어서, 자신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가능한 정도까지 자문해 봄직하다. 그러나 이는 상대적이니, 그 정도를 가늠하실 수 있는 분은 천주님뿐이시다. 그렇더라도 불충에서부터 충실에 이르기까지, 불의로부터 정의에 이르기까지, 악의(惡意)로부터 거룩함에 이르기까지 찬찬히 훑어봄으로써 어떤 상태인지 자문해 보자. 진보하려 애쓰고 있되 정말로 의롭다고 인정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유스툼 피에리(justum fieri)ㅡ의롭게 됨. 의로운 사람은 완전한 사람, 성인다운 사람이다. 성 요셉은 의인이었다(마두 1:19).” 성 베드로는 유데아인에게 주님에 대해 설교하던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셨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자를 배척하며” 또한 실제로 우리 주님은 의인에 대하여 최고의 모범이시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은 천주께, 자기 이웃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각각에 대해 마땅한 것을 돌려주므로 의로운 사람이다. 우리가 진실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모자라고 부족하기 이를 데 없지만 자신에게서 정의, 사랑 그리고 완덕에 반대되는 장애를 제거하여 더 많은 천주님의 성총이 우리를 위해 활동하실 수 있게 힘닿는 대로 노력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오로지 천주님만이 참된 동기이신 특유의 초자연적 생명이라는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노력, 의향과 소망을 들으시므로, 당신께서는 너무나도 특별하게 고해성사 및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성총을 허락해 주시면서 작용하신다. 실로 완덕의 길에서 진보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에 의지하여 영성생활을 유지 및 보강시켜야 한다.

 거룩한 성체성사만이 우리 주님과 결합하도록 이끌어 주는 유일한 성사가 아니니, 고해성사도 장애를 제거하고 성총을 얻도록 도와준다. 대죄를 범한 경우에만 고해성사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오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죄를 범한 경우에만 고해성사를 받으면 된다는 얘기를 듣기 일쑤다. 신자들이 공동으로 죄를 고백하면 사제들이 그에 대한 사죄경을 공동으로 외워 주고는 대죄를 범했을 경우에만 고해성사를 보라고 하든지, 6개월에 12개월 이내에 고해성사를 보라고 하니 도대체 진정한 고해의 목적을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해성사의 특별한 목적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죄를 피하겠다는 의지와 의향을 심어주는 것인즉, 수계범절에 열심히 하여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받는 사람들은 특히, 유혹을 쉽게 떨쳐버릴 수 있게 되어 초자연적이고 내적인 생명에 대한 장애를 스스로에게서 쉽사리 제거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자신을 죄로부터 분리시켜 천주께로 진보하는 것에 관한 주제는 특별히 성 바오로의 영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로마인에게 보내신 서간을 보면(6:18),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죄에서 해방된 너희는 의덕의 종이 되었도다.”


 성경에 있는 ‘의덕’이라는 말은 보통 ‘거룩함’과 동의어다. ‘쌍띠따스-sanctitas(성화)’라는 말은 드물게 눈에 띄는 반면 완전한 의덕 혹은 의롭다고 인정됨을 의미하는 신학 용어인 ‘유스뚬(justum)' 혹은 ’유스띠시에(justitiae)‘는 훨씬 더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어 천주의 종이 되었으니 그 결과는 성화됨이며 [너의 성화됨의] 최종 결과는 영생 이니라”(로마 6:22).


 즉, 자신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성화로써 성장하여 더욱 의롭게 됨ㅡ이들은 (겨우 사순절이나 피정 기간에만 관심을 가지기보다 매일 관심을 가져야하는) 전적으로 내적인 생활의 목표다. 이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고통, 인생사의 문젯거리, 반대, 모욕, 그리고 슬픔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모든 것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될지니.


(1994.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