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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강론 16. 성화의 신비인 십자가(1975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12-20


성화의 신비인 십자가(1975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나이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보십시오.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은 자신이 성소하고 한 뒤를, 여러분의 가정을 뒤로하고 신학교에 재입학한 것을 뒤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과는 별도로, 20여명 혹은 그 정도의 동료들이 이번 주말에 돌아오게 되는데, 그들은 이미 피정을 마쳤기 때문이며, 10월 첫날에는 도착하는 새로운 학생들이 있게 됩니다. 그들에게 환영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신학교에서 찾게 되는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환영의 말씀을, 사제직을 향하거나 여러분이 찾고자하는 수도생활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로 해야 하는... 여러분께 표현하고자 하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의 신비가 우리 영성에 있어서,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 차지해야할 그 장소를 상기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역사를 통하여 보면, 성인들은 진정으로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그들의 그리스도 생활을 깊게 열망하고 천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우리 영혼을 위해 천주 사랑의 위대한 신비를 찾았으니, 이런 영혼들은 그 해결책과 영적생활을 증진시키는 수단을 항상 찾았고 이를 심오한 현실에 부여하였습니다. 이것은 특히 중세시대의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완전한 영혼의 신심을, 십자가의 신비에 대해 이 깊은 신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대성당, 아름다운 교회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지배하고 이 십자가는 제대를 지배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대성당, 교회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표시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도심의 교차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들어 올리어져 있습니다. Foligno의 성 안젤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성 베르나르, 등 이런 분들의 저작에 분명히 나타나는데, 제가 이야기 하자면 그분들의 몸 안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성화의 신비, 우리 의화(義化)의 신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없이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이 신비에 대해 묵상할 필요가 있으니, 왜냐하면 모든 시기, 특히 우리 시대에 아마도 인간은 십자가를 제거하고자 합니다. 십자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 앞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요? 십자가가 희생...희생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생명을 다시 얻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의해, 희생으로 인합니다. "Mors mortua tunc est," 라고 전례에서 말합니다. “죽음은 그리고서 죽으니, 생명의 근원이신 그가 죽었을 때이다.” "Quando mortua vita fuit." 생명이신 그분이 죽었을 때 그때 죽음은 그 자체 죽었습니다. 생명이 승리했습니다. 십자가의 영성을 총체적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생명을 찾기 위해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성 생활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화이니 거룩함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두 가지 움직임, 죄를 증오함과 천주님을 소망하는 것에서 요약함이니, 이는 참으로 간단한 것입니다. 죄에 죽고 천주님을 향하여 삽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외엔 없습니다! 십자가는 천주님 안에서 살기 위해 죄에 죽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영성생활, 우리 내적 생활에 관한 전체적인 설명입니다. 우리 내부의 죄의 생활을 쫒아내어서 결과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죽이는가, 우리의 악한 경향, 악한 본능, 악에 대한 욕망, 천주께 불순종하려는 것을 소멸시켜야 하는 방법을 압니다. 천주님 안에서 살기 위해,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것들을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Liberati a peccatis, servi facti estis justitiae," 라고 바오로 성인은 말씀하십니다. 죄에서 자유로워진 여러분은 거룩함의 종이요, 성화의 노예입니다. "Servi facti estis justitiae."

 

오늘날 사람들은 ‘자유’에 관해 말합니다. 매일 그들은 입으로 너무나 많이 사용합니다. 자유, 자유, 자유! 무엇이 자유인가요? 자유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저들은 더 이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십자가를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희생제사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에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 주님의 희생을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쾌락과 만족을 찾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저들은 십자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왜 그렇게 많은 십자가가 사라졌는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어디에서? 우리가 살아있는 십자가, 저 갈보리로 채워진 십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의 악한 경향을 싸워 이길 필요가 있는 저 거룩한 정신이 담긴 십자가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바로 우리 교회의 거룩한 제대에서, 미사의 희생제사에서입니다!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가 왜 그렇게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하며 우리 성화의 중심지가 되어왔는지, 교회가 그렇게도 집착해왔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는 곳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단순한 역사상의 기억으로 남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살아있는 십자가이며, 새로운 갈보리입니다! 제대의 십자가와 갈보리 십자가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갈보리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피 흘림이 있는 희생이지만, 제대에서는 피 흘림이 없는 방법으로 주님 자신을 제헌하십니다. 그것이 유일한 차이점입니다! 사제가 제대위로 가서 미사를 제헌 할 때마다 새로워지는 진정한 갈보리입니다. 우리 성화의 원천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 거룩한 미사에서입니다.

 

전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말씀은 속죄에 대한 이러한 열망, 죄에 대한 사면을 분명히 표현합니다. 속죄를 위해, 죄를 사면하는 것은 거룩한 미사의 주요 목적입니다. 심지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죄를 사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는 연옥 영혼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슬픕니다. 개신교인들은 이런 점을 부인해왔으며 지금도 거부합니다. 이것이 사제들이 오늘 서품 받은 이유입니다. 요즈음 서품 받은 현대 교회의 사제들은 이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은총의 근원은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미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왜 미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미사를 건드리지 말아야 하며 매우 귀중한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인 미사를 건드리면 우리의 은총의 근원을 단절시킬 위험을 가지게 됩니다. 만약 인간을 위한 희생제사 정신을 변화시키면, 이 미사를 그저 단순한 교제, 단순한 감사, 단순한 식사 개념에 이르게 되도록 만들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그분의 희생적인 제헌인 은총의 원천이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천주님의 사랑에 관한 증언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상에서 못 박히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 보다 더 하실 수 있었던 것... 그 이상 우리 천주께서 하실 수 있었던 것이 있나요? 우리 주님, 천주성자의 희생에 대해 우리가 무감각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른 옛 십자가에 새겨진 다음과 같은 말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네가 이 십자가 위에 새겨진 주님의 사랑을 볼 때,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라고 네가 말할 수 있느냐?” 그래서 우리는 모든 거룩한 영혼들은 그들 앞에 있는 십자가를 가져야 하고, 십자가 안에서 그들의 영적인 생명의 원천, 영적인 지지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하는 그 소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에서 도와주려고 하는 영혼들은 어떠한가요? 갈보리에서 다시 살려고 참여하는 것이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생을 다시 살아가려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자신을 일치하려고 하는 영혼들입니다. 연민 - 성모님의 연민은 우리 사제들의 후원자입니다. 왜 그런가요? 그리스도의 영혼은 우리 주님과 함께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우리 주님과 고통을 함께 하고자 원하지 않는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겪어야 할뿐더러 말하자면 그리스도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죄, 모든 불의, 신성모독 그리고 세상에 너무나 많이 창궐한 죄를 사하기 위하여 고통 받는 우리 주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완성해야 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완성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소망해야 한다.


비싼 값으로 비용을 치룰 것이요...비싼 값으로 치루게 될 것이니...우리가 수난당하리라는 소망,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완성시키고자 한다면 그분과 함께 수난 받고 그분을 그대로 닮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천주님은 나를 축복하실 것이고 모든 고통으로부터 나를 면하게 해주실 것이야, 나는 고통 없이, 희생 없이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야, 왜냐하면 내가 천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요, 천주님은 나를 반드시 사랑하시니 그러므로 좋으신 주님께서 분명히 나를 고통 받게 하길 원하시진 않으실 것이야“라고 너무나 쉽게 말합니다.


이는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 주님께서 고통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이셨다면, 그러면 반대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통을 받기를 원해야 되고 주님과 함께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자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의 가시가 우리를 찌를 때, 우리는 즐거워해야 하며, 이러한 희생 속에서 우리의 기쁨과 행복을 찾아야 하고, 천주께서 우리가 교제를 원하시는 것처럼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그리고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의 수난에 우리 자신을 천주님과 교제하게끔 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천주님으로부터 오는 또 다른 사랑의 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일치되어야 한다는 그분의 바람 아닙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가톨릭인의 가르침이며, 우리의 신앙이요, 우리 신앙의 목표, 우리 신앙의 실제입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 세대들이 이해했던 것이니, 고통을 받았던 거룩한 아버지의 세대와 그리스도인 방법에서 고통을 겪었던 가정의 어머니들이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받아드렸고, 기쁨으로 어려움을 받아드렸으니, 그분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모범이 된 분들입니다. 수난과 고통 속에서 그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고통을 어떻게 지탱하는지를 알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성소자(聖召者)들을 배출한 그리스도인 가정 세대들이 있었습니다. 성소자들이 태어난 곳은 바로 그 안에서였습니다. 부모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살아가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겪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며, 이와 같은 신앙으로 미사의 거룩한 희생 제사를 참여하고 도우며, 대단한 경건함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희생제물로서,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정신으로서 그러한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가운데 성소자들이 태어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이런 가톨릭 교리가 어찌나 아름다운지요! 우리의 생활을 그 얼마나 완전히 바꾸는지요! 이곳 지상에서 우리의 생활을 참으로 완전하게 바꿉니다! 영원한 생명 "O crux, ave, spes nostra!"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으로서 십자가를 언급하는데, 사실, 십자가는 유일한 길이요 방법, 영생으로 가는 영광으로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지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을 쫓아 반드시 십자가를 지어야 하며 감당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영생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니,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추구해야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눈앞에 있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장 귀중한 소망은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에서 돕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시켜야만 하는 그 기쁨 이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그 기쁨 이전에, 어느 날 여러분이 제대에 올라가고 우리 주님의 희생을 제헌하게 될, 그리하여 여러분이 갈보리의 희생 제사를 다시 재현하고 세상의 죄를 구원하기 위하여 제대 위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희생 제물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제헌하려는 그런 생각 이전에, 여러분이 학업 중에 아마도 가지게 될 모든 작은 어려움을 일으키는...건강이라든가 사라지게 될 모든 것을 일으키는 공동체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마음과 영혼을 발사마향으로 채우는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바오로 성인이 말씀하시듯이 이 십자가의 교리를 전할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것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nisi Jesum et Jesum crucifixum."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외에는 다른 설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오로 성인의 설교였습니다. 제가 확신하건대 이것이 여러분의 설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제직에의 참여의 모범으로서 여러분은 통고의 모친이신 복되신 성모님을 세상에 전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