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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와 성비오10세회를 변호함 - 2) “만일 한 가지 명을 범한다면 곧 계명의 전부를 거스려 범죄하는 것이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1-17


르페브르 대주교와 성비오10세회를 변호함


2) “만일 한 가지 명을 범한다면 곧 계명의 전부를 거스려 범죄하는 것이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신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프랑스, 스위스, 독일, 라틴 아메리카, 기타 등등에 많이 퍼져 있다. 그들은 르페브르 대주교로 말미암아, 교회를 최신식으로 바꾼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화”의 마수와도 같은 회오리가 빼앗아 버린 영적 고향을 되찾게 되었다. 오늘날의 성직위계에 관한 한, 그는 공식적으로는 “이단”이고 “파문당한” 상태이며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교회 안에서의 위기에 책임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영혼들에게 가져다주어, 르페브르 대주교가 이러한 교회의 특수 상황에서 자신의 주교 행정상의 권력을 이례적으로 이용하도록 유도한 비상사태를 깨닫기를 지연시킨 데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추측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할 것이다.(1988년 7월 엔젤러스-Angelus지를 보라 ).


 한 편, 르페브르 대주교를 존경하는 사람들과 비난하는 사람들 중간에는 그것에 대한 반응이 두 가지가 더 있다. 우선, 교회가 현재 나아가는 바에 관하여 르페브르 대주교의 판단과 뜻을 같이 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둘째로는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을 디디는 데에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신앙은, 완전하든지 아니면 결코 아니든지이다: 이들 중에서 전자는 전체가 아닌 것은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교회 내에는 아직 건전한 것이 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분만이 건강하다는 것이 신앙에 관한 문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레오 13세는 기술한다, “몬타니스트(Montanist)인 아리우스파는 가톨릭 교리 전체를 버린 것이 아니었고, 단지 가톨릭 교리의 이 부분 혹은 저 부분만을 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교회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공표하였고 교회의 품으로부터 추방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Satis Cognitum). 그 이유는 더 이상 간단할 수 없었다: “만약 하나의 교리만을 받아들이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 실제적인 신앙의 본질이다.” 교회는 신덕이란, “천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것들이 참되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써, 당신의 은총으로 불어 넣어지고 도움을 받는 초자연적인 덕”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 이성의 자연적인 빛으로 알게 되는 사물이 가진 고유의 사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계시해주신 천주님 자신의 권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믿는 바, 천주께서는 스스로 속지 못하시고 또한 우리를 속이지 못 하시나니라.”(1차 바티칸 Sess. 3c. 3D 1789).


  “천주님께서 하나인 진리를 계시해 주셨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믿지 않는다면, 그 경우에는 신성한 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 그 이유는 성 야고버가 도덕의 범위 내에서 범죄에 관해 판단한 내용을 신앙 문제에 해당되는 사고의 오류에도 역시 적용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한 가지 명을 범한다면 곧 법률의 전부를 거스려 범죄함이 되는 연고니라”(야고버 2. 10).


 아니, 그것은 오히려 사고의 오류에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법률을 부여하신 천주님의 최고 권위에 대한 경멸을 - 일부러 의도하지 않는 한 - 자신 안에서 결코 깨달을 수 없게 되어 있는 단 한 가지를 깨뜨리는 자가 도덕 법규 전체를 위반했다고 말하는 것은 덜 적합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앙 중에서 단 한 가지 항목이라도 천주께서 계시해주신 진리에 굴복하지 않는 자는, 신앙을 전체로 잃는 것인 바, 왜냐하면 그 분은 최고의 진리이시며, 신앙을 믿음에 있어서 최적의 동기이신 천주님께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들은 나와 일치한다: 어느 면으로는 나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나와 일치하지 않는 얼마 안 되는 것 때문에 나와 일치하는 많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소용이 없다.”(Enarrat. in Ps. 54. n. 19).


 그 때문에 당연히: 그리스도인의 교리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자는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믿는 고로: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 속으로 자신의 지성을 끌어들이기”( 고린도전 10. 5- 천주께 의합함)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실제로는 천주님보다도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복음 가운데서 좋아하는 것은 믿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자는 복음을 믿는다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Bk. 17 Contra Faustum c. 3: Satis Congnitum)라고 하였다.


 레오 13세는 “이러한 이유로 의무에 주의를 다하는 교회는 각 부분들 중 단 한가지에서라도 교리를 흠 없는 완전한 상태로 보존시키기 위해 열심과 노력을 다하기를 싫증낸 적이 없노라”(Satis Cognitum)


 오늘날, 바오로 6세가 얼마 동안은 눌러놓았던 현대주의자들에게 문을 열어준 이후, 가톨릭의 교회를 거꾸로 뒤바꿔 놓은 폭풍 속에서 흠 없는 신앙이기를 여전히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완벽주의”라고 비난받는다는 사실로써 지적되듯이, 흠 없는 신앙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고 공허한 말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가톨릭의 교리는 - 교회는 가르친다. - 흠이 없든지 아니면 결코 그렇지 않든지이다. 신앙에 관해서는 “완벽주의”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예컨대 신앙을 온전한 상태로 보전하는 데에도 도가 지나치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교회가 “온 열성과 노력을 다하여 여러 부분들 중 단 한가지에서라도 흠 없는 상태의 신앙이 되도록 기키기 위해”( 레오 13, Satis Cognitum ) 일했을 경우에는 결코 지나친 상태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을 조각내어 인간 자신을 만족시킨다면 그것은 교회에 소용없는 일이다. 어떤 열교 분파(개신교)는 가톨릭의 교리 중에서 어떤 부분을 보존하기도 하지만 완전한 교리는 틀림없이 오직 하나인 참 그리스도 교회에만 속해 있다.


신앙과 순종


 위에서 제시한 중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 중에서 두 번째는, 르페브르 대주교가 저항하는 동기를 이해하는 한 편, 로마의 권위와 갈등 속에서 그 존재가 방해받는다. 이들은 - 비록 큰소리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 순종이 신앙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실제에 있어서는 그 반대가 옳다: 순종이 신앙을 섬겨야 한다. 교황제도라 할지라도 신을 섬기기 위함이며 주교의 성직 수행도 신앙을 섬기기 위함이다. 교회 그 자체는 우선 무엇보다도 신앙을 온전하게 지키고 보호하고 설명해주며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불분명하고 항상 모호하여 신앙을 파괴시키거나 적어도 약화시키기에 충분한 지시로써 교회가 지향하는 바에 “순종”하도록 강요하는 성직 위계는 기본적인 의무에서 실패한 성직 위계로서 그 힘을 악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 전체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그것을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바꾸지 못하도록 교황주교, 그리고 사제에 순종한다. 그런 상황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저항하는 것은 의무일 뿐 아니라, 교회가 재생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 이다.


비상사태에 대한 비상수단


 실제로 르페브르 대주교의 행동 방향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이루고 다스리는 골육을 지닌 사람들을 포위함으로써 교회를 포위하고 있는 신앙의 위치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인식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교회 상황이 얼마나 비상사태인지는, 충분히 생각하면 부분적으로 나마 깨달을 수 있다:


   1. 일개 주교인 르페브르 대주교가 자신 및 다른 이를 위해, 2차 바티칸 때까지 교회가 전달해 오고 있는 교리의 완전성을 보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신성한 성직 수여권에 의해 뽑힌 바로 그 교황이 지키고 보호하고 있어야 하는 전통을 계속 시행할 자유를 얻으려고 교황 바오로 6세에게 가서 청했으나 성공 하지 못했음.


 2. 화해에 대비하여 로마 당국이 지키고 보호해 오고 있어야 했던 신앙의 완전성을 교회에서 지키게 될 그때까지 보존 시킨다는 보증을 얻으려고 자신 및 로마당국으로 부터의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동 주교가 가서 요청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음.


 3. 르페브르 대주교가 주교성성을 행한 후에야 겨우 르페브르 대주교에게는 여러 해 동안 금지되었던 “전통의 시행”을 위한 자유 통제권이 전례상의 영역에 한하여 허락되었고, 그것은 분명히 대주교가 행한 주교성성 때문이었으며, 이는 가능성 있는 “전통주의자들”을 최대다수로 그에게서 빼앗기 위한 한 가지 목적 때문에만 허락되었음.


 4. 르페브르 대주교가 전통주의자들에게 파문이 떨어지리라고 예측했던 바, 바티칸이 내민 손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얻고 있는 “전통주의자들”에게서, 괄목할 만하면서도 희귀한 양상으로, 온전하게 보존해 온 가톨릭 신앙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현대주의의 로마가 심사숙고 하고 있음: “전통주의자”란 랏징거 추기경이 묘사한대로인 “고전적인 느낌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임.


 5. 저들 “전통주의자들”이 첫째는, 그 사건 후에 르페브르 대주교가 주교성성을 행한 것을 뒷받침해줄 만한 “비상사태”가 과거에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르페브르 대주교를 향한 자신들의 행동을 공식적인 의견 앞에서 정당화시키는 것: 둘째로는 르페브르 대주교의 상황을 저들 자신의 것처럼 인식하는 모든 이에 대해 “유희용 거울”의 작용을 하는 것만이 로마 당국에게 가치가 있음.


 6. 저들 “전통주의자들”이 전통을 지키는 것이 전례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고, 교회를 파괴시키는 자들이 파괴시키고 있는 다른 것 모두에 대해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파괴자들을 그대로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교들, 신학자들과 교회의 새로운 코스로 “보내지는” 평신도들이 저들을 배척하고 반대함. 왜냐하면 저들은 새 미사 양식이 다른 교리를 표현한다는 것을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 비판하면서 말하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 권위를 내세우고 있는 요즈음 사람들이, 2차 바티칸 때까지는 교회가 확고하게 전달해 온 교리를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반감이야말로 가톨릭계를 모조리 뒤덮어 버린 신앙의 위기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의화의 기초이면서 뿌리인 인류 구원의 시작”( 트렌트 공의회, D. 801 )인 신앙을 잃을 위기, 심각한 위기에 노출된 영혼들을 위해 비상사태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의 증거이다. 따라서 이러한 반감은 역시, 교회 내에서 위기가 계속되는 한, 영혼들이 자신의 가톨릭 신앙에 매달려야 하는 수단을 그들에게 보장해주기 위해 르페브르 대주교가 만들고 대주교 고유의 것인 주교로서의 권한을 특별이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 시킨다.


무슨 소망?


 르페브르 대주교와 가톨릭의 신앙 안에서 저항하고 있는 모든 이가 가진 소망은 곧 교회 자체의 소망이다. 교회가 자체의 성직자들이 배반함으로 인하여 매우 어려운 시력은 겪을 수는 있어도 교회 자체는 멸망하지 않으므로, 바오로 6세는 “교회의 자멸”에 대해 - 부적합하게 - 말했다고 할 수 있다. 천주님의 약속 때문에 멸망할 수 없는 교회는 마침내는 항상 해 왔던 대로 신앙의 흠 없는 상태를 다시 이륙할 것이다: 내부에 있는 모든 원수의 오류와 더불어 원수들을 모두 흩어버림으로써 말이다.


 그러면, 르페브르 대주교가 지난 편지에서 교황에게 썼듯이, 근래에 현대주의가 만연한 로마는 가톨릭의 영원한 로마로 다시 되돌아 올 것이며, 가톨릭계 전체가 르페브르 대주교와 “전통주의자들”이 결코 잃지 않은 것: 가톨릭 신앙의 완전성을 회복했을 것이므로, 르페브르 대주교 및 소위 “전통주의자들”의 “화해”의 문제는 더 이상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