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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와 성비오10세회를 변호함 3) 가톨릭 생활의 오아시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1-23


르페브르 대주교와 성비오10세회를 변호함


3) 가톨릭 생활의 오아시스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 예측

 

 가뇽 추기경의 예측이 그랬었는데, 잠시 돌이켜 보면 그는 르페브르 대주교의 주교성성이 신자 수의 상당한 감소를 초래할 것이라고 공언했었다. 그는 로마 및 교황과의 결탁에 힘업어 신자들을 살펴볼 기회를 가졌을 때 그렇게 예측했었다. 그러나 언론조차도 주교성성 기념일에 회상했듯이 그의 예측이 잘못됐었다는 것이 실로 충분히 입증되었다. 사실상, 로마 및 교황과의 결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있을 수 없는 이단이라 외쳐대는 열띤 함성과 저들이 위협받는 무효의 파문을 무시하고, 르페브르 대주교 산하의 사제들이 이끄는 수도원을 계속해서 자주 방문 해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교황으로부터의 정식 명령이 없이 주교성성을 행했을 때 르페브르 대주교가 호소한대로 비상사태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가장 설득력 있게 입증한 셈이다.

 

 “Miereor Super Turbam" - 신자들이 르페브르 대주교의 수도원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톨릭 생활의 오아시스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주변과 밖에서 보는 것은 무엇인가? 신앙의 사막이다.

 

 소위 “천주님의 백성” 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무지, 무관심, 가장 신성한 것에 대한 존경심의 결여 속에서 살고 있어서 지옥으로 이끄는 “넓은 길”로 나아가고 있다. 영혼들은 극도의 영적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 명쾌하고도 확고한 교리를 목말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신들에게 그것을 줄 수 있는 곳과 사람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의 경건한 모습과 정신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시대를 역행하여 중세적인 신앙의 모습에 집착하는 자로써 조롱을 당하고 있고, 그들을 지지해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빼앗기는 식으로 박해를 받기까지 하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영웅적인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실상, 가톨릭 백성의 고통은 결코 그렇게 대단하거나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다른 덕목도, 신학적 덕목 중 첫째인 신덕 없이는 있을 수 없기에 신덕이 위대한 것이다: 성직 위계 중 최고의 위치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위기는 위에서 아래로 퍼져 신자들 사이에 전반적으로 퍼져 나갔다.

 

백성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악한 죄가 고대로부터 나타났다.( 참고. 다니엘 13, 5 )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최고 권위를, 자유주의 - 현대주의 - 에큐메니즘의 환상을 돕는 데 사용한 교황: 헤아릴 수도 없을 만치, 천주님이라는 단어 및 교회의 치교권을 부인하거나 왜곡시키는 자만심과 오만함을 키운 헛된 지식으로 부풀려진, 천주를 제쳐놓은 “신학”을 장려하는 신학자들: 그들과 한통속이거나 겁쟁이인 이들, 혹은 영혼들 및 그들이 지극히 필요로 하는 것에 무관심한 주교들, 오류의 주인들 및 그들의 그릇된 교리를 보호하고 강화시키도록 조직된 무모한 사람들,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한 신앙으로 인해서 신앙에 반하는 죄를 그토록 무수하게 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지나쳐 버리도록 유인하는 다른 이들, 신앙을 거스려 의심함으로 인해 사제로서의 열성이 마비당해서 자신의 성직 수행을 저버리거나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사제들: 이런 사람들이 천주님의 백성 가운데 있는 신앙을 소멸시키거나 약화시키는 데 우선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신앙의 붕괴

 

 백성들이 마음과 정신으로 믿는 주관적 신앙의 위기는, 믿어져야 할 객관적인 신앙의 모든 신비를 둘러싸고 있는 의심과 거부에서 나타난다:

 

원죄를 부인함, 주교 공동체 안에서 및 가톨릭을 가장한 간행물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부활을 부인하거나 의심함: 사람이 되신 천주님의 몸이시기 때문에 숭배하는 마음을 영혼들 안에서 절멸시키는, 손으로 하는 영성체 같은 것을 시행함으로써 모호하고, 서두르고, 냉랭하고, 무익하며, 깨달을 수 없고, 그리고 더럽혀지는 미사 양식에서, 거룩한 성체성사의 신비의 신성함이 빠져버림:

 

공동고백이라는 무익한 의식을 행함으로써 소홀해지고 자리를 빼앗기고 가치가 떨어진 고백성사:


천주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맡겨주신 파티마의 가장 거룩하신 동정녀, 하자 없으신 성심께 대한 공경이 그늘 속에 가리워짐:

마리아의 최고 특권을 부인함:

 

교황의 인격만큼이나 이의가 제기되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에 아첨함 - 설상가상으로 - 베드로 후계자 그 자신이 ‘수위권을 여전히 이용하지 않음:


하나인 참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음에도 교회 자신의 아들들과 성직자들이 그렇게 인식하지 않음:
착한 천사 혹은 악한 천사의 존재가 부인되거나 잊혀짐:

성인들에게 대한 공경을 완전히 무시함: 심판, 지옥과 천국을 거부하고나 침묵 속에 지나쳐 버림 등.

 

 세계를 향해 문을 연, 신앙의 공백 속에서

 

 그에 따라 신앙의 불변하는 확실성과 더불어 가톨릭의 경건함과 종교 및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필연적으로 무너졌다. ‘세계를 향한 개방’이 초자연에 의해 남겨진 공백을 채우게 되었다. 한 때의 천국과 은총이 관념으로부터 부인되거나 사라졌고 오직 세속과 인간만이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천주를 떠받쳐야 할 성직자들은 이제 무신론 세계와 같은 말을 하게 되었다. 인간이 천주님보다 더 중요하고 초자연적인 궁극의 목표보다도 이 지상에서 잘 지내고자 하는 인간적인 계획이나 노력과 같은 인본주의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궁극의 목표란 천주님의 교회 내의 세계의 정신이다 미사성제 가톨릭 전례의 전례상의 예식과 광휘(光輝)조차도 세속적인 모임 대통령 및 그의 군중이 한데 모여 보여주기 위한 특별한 경우에도 미치지 못하게 감소되었다. 실제로 신자들에게 오류와 악이 보급되는 요즈음에는 신자들은 절대로 종교적인 면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다 천주를 원치 않는 현대의 인간에 맞추기 위해 그들은 기도를 빼고, 희생을 빼고, 내세를 빼고 천국도 지옥도 빼버린 현대의 종교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요컨대 모든 종교성 내지는 인간의 존엄성마저도 부정하는바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이란 영원성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위기 및 세속적 정신은 확실히 성직 계급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 지지함에 따라 수도원을 세속의 정신으로 가득차고 천주의 정신은 더욱 텅 비게 하여 흠 없이 놔두지 않은바 기도와 내적 생활을 하는 장소에서 타락과 나아가서는 불미스런 일을 행하는 장소로 변하게 하였다.

 

 아직까지 경건하고 신앙 및 신앙생활이 와해되는 것을 한탄하는 얼마 안 되는 사제와 수도자들이 박해받고 고립 되고 있다. 교회를 위한 그들의 염려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거의 모두가 평신도인 극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연설이나 서한으로써 가톨릭 신앙이 온전하고 순수하도록 지켜 왔다. 교회 역사상 모든 시대를 통틀어 교회와 예식의 아름다움과 단정함과 광휘야말로 생활한 신앙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어 왔던 고로 교회 예식과 교회 건물의 끔직한 쇠퇴는 이렇듯 신앙이 없는 시대에 대한 증거가 된다.

 

 에큐메니즘 혹은 교회 내에서의 ‘완화’

 

 우리에게서 갈라져 나간 형제들 혹은 전 인류와의 일치를 장려한다고 하는 그릇된 생각으로써 진리를 침묵에서 기꺼이 묵과해 버리거나, 진리의 내용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좀 더 안이하게 하는 에큐메니즘도 역시 신앙을 파괴 시키거나, 혹은 적어도 신앙을 놀랄만하게 약화시켰음을 증명해준다.

 

 에큐메니즘은 교회가 자멸하도록 하는 주요 수단인 바, 이로 이어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에큐메니즘이 현대주의자들의 목적에 딱 들어맞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현대주의자는 다른 교리에 반하는 교리를 따로 세우거나 전통교회에 반대되는 새 교회를 따로 세울 필요가 없다. 이미 세워져 있는 교회가 행동하는 시발점 내지는 목표와 같다. 현대주의는 새로이 받아들일 만한 교리를 성급하게 구하거나 오래 동안 거부당한 교회 조직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다 현대주의가 원한 것은 오로지 교회가 그 타협할 줄 모르는 태도를 완화시키게 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단호한 태도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교회 혹은 오히려 성직자들이 오류에 직면하여 지극히 사소한 부분을 믿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지극히 사소한 것을 믿게 되는 것이면 족하였다.

 

 조직은 아직 요원하다
 
 그런 암흑 한 가운데에서는 복구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오는 세대의 신앙은 부인과 의심이 주입됨으로써 불신이 스며든 새 가톨릭 요리문답으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서서히 약해지기 마련이다 - 어린이에게서까지도- 한 편 새로운 신학자 새로운 신학이 사제직에 나서고자 하는 소수의 사제 후보들 안에 있는 신앙을 말살시킨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신학교에서는 실제로 벌써 나쁜 상태가 되어있는 현 세대보다도 더욱 나쁜 사제의 세대가 교회에 대비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학교가 교회들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한 편으로 하나인 참된 교회의 대외적 단일성을 파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을 고무시키는 한 편, 사랑의 기본적 질서를 파괴시키고 있다. 천주의 사랑을 위해 천주를 사랑하지 않는 이웃을 사랑하는 체 함으로써 그것은 한 편으로는 유아를 육체적으로 죽이는 것을 비난하면서 유아의 영혼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다.

 

 악의 근원에서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직자였을 때 볼 수 있었던 사하라 사막보다도 훨씬 더 황폐하고도 황폐한 신앙의 볼모지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그가 직접 논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논쟁은 그 후에 온 것이다 그는 교회를 위해 생활한 신앙과 신실한 경건함을 지닌 사제들의 세대를 이루기 위해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비오 10세가 첫 번째로 교서에서 주교들에게 추천한 프로그램에 따라 악의 근원을 파고들었다. 그대들의 첫 번째 관심사가 다른 이들 안에 그리스도를 이루어야 할 운명에 있는 이들 안에 그들이 요구하는 의무로 인해 그리스도를 이루는 것이게 하자.
 
 르페브르 대주교가 그의 신학생들에게 주어진 과정에서 말했다. 공생활 3년 동안에 당신의 사도를 모으심으로써 우리 주님께서는 사실상 신학교를 만드셨다는 것이 정상이다(1988년 9월). 그리고 신학교에서 태어난 교회는 항상 교회가 가장 암흑인 시기에, 신학교에서 말하자면 가톨릭의 사제직을 복구하는 데서부터 재생한다.

 

 사막의 오아시스
 
 오늘날 르페브르 대주교의 신학교에서 배출된 사제들이 관리하는 소수도원은 보편적이게 된 신앙의 불모지에서 가톨릭 생활의 오아시스이고 수도원들은 여기저기서 생활한 신앙을 지닌 사제들이 또한 그리스도인 백성들의 신앙과 경건함을 다시 꽃 피운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소수도원에서 신자들은 필요한 거룩한 지식으로 갖춰지고, 게다가 신앙과 경건함과 영혼을 위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고 세속의 정신이 아닌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정신으로 황홀해진 사제들이 교회를 위해 용기 있게 일하며 꿋꿋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관여치 않고 자신이 입고 있는 사제의 옷차림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제들을 보는 것이다.

 

 이런 사제들 덕분에 어떤 신자들은 제 2차 바티칸의 최신식으로 만드는 괴물에 의해 잘못 인도된 다른 사제들이 낚아채 가버린 신앙과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또 다른 신자들은 가톨릭의 신앙이 교회의 새 코스에서 방향을 잃은 모든 이 안에서 파괴되거나 의심으로 침식되는 것을 아는 사제들이 가톨릭의 신앙을 보존시켜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상의 두 종류의 신자들이 발아래 짓밟히고 군데군데 파괴된 모든 것,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디서든지 항상 생활화해야 하는 의무인 신앙 기도의 정신, 성체께 대한 사랑, 동정 성모님께 대한 신심, 영신수련, 그리고 가톨릭교회 고유의 다른 모든 축복들을 다시 발견했다. 신자들이 이렇듯 생활한 신앙의 오아시스를 버리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운가? 교회의 새 코스를 꾀한 사람들은 공동체가 실제적으로, 즉 신앙 안에서 파괴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으므로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이름하에 교류 외에 신자들에게 무엇을 제안 할 수 있었는가? 개혁자들이 그들에게 제안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파멸이었다. 신자들은 로마와의 교류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사막으로 쫓겨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그것이 얼마 동안 그들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는바 파문으로 몰고 가는 박해를 그들이 차분하게 맞이하는 이유이다. 이 같은 박해는 그들의 신념, 오로지 가톨릭의 신앙을 온전하게 보존하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것은 진복팔단 중 여덟 번째 라는 신념 안에서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으나 박해가 교회 자체 내에서 올 때에는 교회를 강타한 거대한 재앙 및 박해가 나타난다는 특별히 심각한 상황의 가장 뚜렷한 증거이다. 특별히 책임 있는 자가 누구인지, 혹은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다름 아닌 초자연적인 상식, 즉 그들의 “sensus fidei”가 알려주는 바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결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동안, 바로 교회의 성직자들이 쇠퇴와 황폐를 초래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교회 역사는 가르쳐 준다. 즉, 아직도 완전하고도 확고한 신앙 안에서 경건함의 정신 속에서 자제하는 생활 속에서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전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둡고도 가장 풍부한 은총의 시간 감실 안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과 함께하는 미사를 영속시키기 위한 바램 속에서 사제들을 배출하려는 몇 안 되는 신학교를 굳이 파괴시키려고 하는 것은 사악한 일이다.

 

 안 된다. 교회 안팎에 있는 원수의 모든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천주의 하나인 교회가 황폐화됨으로 고통을 당하고, 그것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위해 기도하는 동안에 내적으로는 가톨릭의 사제직이 복구되도록 자신을 준비시키고 있고 온전한 가톨릭의 신앙과 경건함 속에 머무르도록 영혼들은 지키고 있으며 한결같이 봉헌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뜻을 같이하는 사제들 신자들 혹은 수도자들, 가톨릭교회를 혼란시킨 악마적 분규의 물결에 대항하는 버팀목, 피난처, 그리고 훌륭한 사제들을 교회 및 천주께 드리는 것만이 오직 한 가지 목적인 작업을 천주께서는 사랑으로써 경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신자들은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