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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 1계명- 제 1부:내적요구조건(2016-01-10)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1-11



제 1계명- 제 1부:내적요구조건(2016-01-10)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천주님의 계명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요, 이 계명들은 본질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데, 주님의 생활을 살아가는 것, 또는 오히려 그분이 우리 안에 거(居)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덕행이 지속되는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십계명(十誡命)을 준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십계명 그 자체가 “생명의 계명”입니다.

천주님은 생활하시고(살아계시고)모든 생명의 원천(源泉)입니다. 천주님의 생명이란 동물의 생명, 감각적인 생명이 아니라 오히려 최고의 영적인 생명입니다. 천주님의 생명 안에 무엇이 존재하나요? 천주님은 순수 영(靈)이요, 최고의 지성이며 최고의 의지입니다. 그분의 생명은 최고의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찬 생명이며, 이 진리가 그분 자신이며, 참으로 무한하신 선에 대한 사랑의 진리이며, 이 또한 그분 자신입니다.


천주님의 생명은 묵상하는 생명입니다. 천주님은 너무나 위대하시고 너무나 완벽하셔서 어떠한 창조된 지성체도 천주님의 실체에 대해 충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도, 위대한 신학자도 심지어 지극히 높은 세라핌과 케루빔도, 천국에 계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조차도 모릅니다. 오직 천주님 만이 당신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아십니다. 천주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영원하신 말씀으로 표현하십니다: “비롯됨에 말씀이 계시고, 말씀이 또 천주께 계시니, 말씀이 곧 천주시더라.“(요왕1:1)


저 천주님의 말씀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듯이(1) “사랑이 숨쉬는 말씀”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함께 사랑의 영(靈)이자, 천주님을 위한 모든 사물 위와, 모든 사물에 관한 천주님의 사랑이신 성신을 “호흡”하십니다.  모든 영원을 위해 성부께서는 당신의 말씀이신 천주 성자께 말씀하시고, 성부와 성자는 함께 당신들이 공유하시는 성신이신 사랑의 영을 호흡하십니다. 이것이 천주님의 영원하신 생명입니다. 성인들은 이 지극히 경이로운 묵상을 영원히 보고 황홀에 빠지도록 허용되었습니다. “만민이 너 하나이신 참 천주와, 너 보내신 바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이것이 곧 영생이라.“(요왕17:3) “우리는 천주와 비슷할 것을 아노니, 대저 사실대로의 저를 뵈올 것임이니라.“(요한1서3:2)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적에, 그분께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우리가 천주의 성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성부를 위해, 천주님을 위해 전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첫 번째 계명입니다. 천주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처음이자 끝이시며, 시작이며 마지막입니다.” (묵시록 22;13) 천주님은 우리 생활에서 첫 번째 위치에 있어야 되고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천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계셔야 되며, 두 번째 자리에 계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보다도 그분을 더 선호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통치하셔야 합니다. “네 나라가 임하소서!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테오6:10) 궁극적인 목적의 존엄성을 피조물에게 주는 행위는 우상의 일종이며, 첫 계명에 의해 엄격히 금지됩니다. [여기서 잠시 동영상에 나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스캔들을 언급하심]


많은 이들이 “나는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으니, 좋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저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천주님 안에서 설정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부(富), 쾌락, 또는 다른 만들어진 목적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바로 첫 계명을 거스르는 범죄입니다. 저들은 자기 생활에 있어서 첫 번째 자리를 천주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저들은 “금 송아지를 숭배”하거나, 또는 유일하신 참 천주보다는 자기 자신을 섬깁니다.

우리를 다스리시는 천주님의 통치는 주로 내부적인 것, 우리의 지성과 우리의 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천주님은 우리 지성 안에서 신덕으로 다스리는데,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주이신 당신을 드러내는 최고의 진리로서 우리가 천주께 밀착할 때 그렇습니다. 천주님은 망덕과 애덕으로서 우리의 의지를 다스리는데, 우리가 만물 위에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다른 것을 사랑할 때 그러합니다. 이 덕성들은 제1계명에 의해 부여된 첫 번째 두 의무이니  참 신앙(가톨릭)에 충직해야 할 의무와 모든 사물 위에 천주님을 사랑해야 할 의무입니다. 이 안에 참 신앙과 사랑에 의해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를 사랑하는 묵상생활, 영적 생활이 구성됩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천주님이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 심지어 우리가 천주님에 대해 믿은 것에 대해 무관심한 것 아니냐 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이 언급하는 이와 같은 무관심한 “(각종의)신”은 참 천주가 아닙니다. 참 천주는 최고의 지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분은 모든 진리를 알고, 특히 모든 조성된 진리를 알며 천주 자신을 아십니다. 천주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비밀을 드러내시고자 할 때, 천주님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천주님은 우리가 천주님의 말씀을 믿던 안 믿던 간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아닙니다. 천주님은 우리가 천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기 원하십니다. 천주님은 모든 인간이 천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기 원하십니다.


어떤 이가 천주님을 믿지 않는다 해서 천주님이 덜 선하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천주님을 믿지 않을 때, 우리에게 있어서 안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둠에 있는 것이 되고 진리에 무지하게 되고 -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알려진 진리를 거부하는 상태(이것이 성신을 거부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천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무지 상태로 있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천주님은 “모든 이가 구원이 되게 하시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티모디 전 2:4)원하 십니다. 


진리는 그분이 드러낸 것이고, 천주님이 성 교회에 맡겨놓으사, 교회가 “신앙의 훌륭한 유산”(티모디 후 1;14)을 지키도록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천주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를 통해 진리의 완벽함을 주셨으니, 주님 이후 성 요한의 계시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주님이 계신 하신 것에 첨가한 이가 없습니다. “신앙의 유산”은 마지막 종도인 성 요한의 죽음 때에 닫혔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각각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글자 하나하나 모두를 암기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 아니고 “성 교회가 가르친 것”을 믿는 것이며, 그리고 성 삼위의 신비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고, 성 육신에 대해 아는 것이고, 구원에 대해 알고 그리고서 우리가 구원에 대해 필요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구약에서도, 사람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에 대한 신앙”을 가진 것으로 충분하였으며, 심지어 아브라함 이전에는, 천주께서 아담에게 계시한 것을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고 그리고 이 계시는 “원시 계시”로서 전승되어왔으며, “여인의 씨(후손)”에 대한 지식이 포함된 것입니다.


선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에게, 천주님께서는 그들이 핵심적인 요소 안에서, 최소한 필요하다면 천신들의 매개를 통하여 계시를 알게끔 해주시지만, 대개는 훌륭한 가톨릭의 성직자와 증언을 통하여 알려주십니다. 계시하신 천주님의 권위로 인하여 천주께서 계시한 바를 모두 믿는 것은, 이것이 신덕이며 그리고 참 신앙은 구원에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이 없이는 천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나니”(헤브레야 11:5)

그래서 신앙에 거스르는 죄들은 제 1계명에 거스르는 죄입니다. 신앙에 거스르는 첫 번째 죄가 이단(異端)이니, 즉 이것은 계시 가운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고르고 선택하여 그래서 그리스도에 의해 정해진 권위당국(교회)이 우리를 가르치는 것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의 판단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무지가 이단은 아니나, 어떤 사람은 자기가 고르고 선택함이 없이 설교자(說敎者)에 의해 속을 수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런 경우는 이단이라는 공식적인 죄가 없는, 참 신앙에 대한 단순한 지식의 결핍입니다.


이것은 이단파 구역에서 가톨릭교회 밖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흔히 발생하거니와, 혹은 어떤 이가 이교도에서 이 같은 이단파로 개종할 때 생깁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천주를,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그들은 조만간 이 종파가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뉴만 추기경분과 같은 어떤 분들은 탐구의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니, 저들이 진리를 찾는 데 우리가 돕도록 해야 하고, 유일한 참 교회로 옮길 수 있게끔 격려(激勵)하는 동안에 그런 이들에게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을 거스르는 두 번째 죄는 배교이니, 이 배교는 신앙을 전부 거부하는 것입니다. 참 신앙을 알고 난 후에, 그는 이 신앙을 거부할 좋은 이유를 가질 수 없으니, 왜냐하면 진리를 거부할 좋은 이유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쁜 사제들의 추문이 있고 이 추문이 그 사제들에게는 엄중한 책임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拒否)할 이유가 못됩니다. 주님은 이들이 나쁜 사제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충직하게 남아있는 이들에게 영원히 보상을 주시는 주인으로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악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나쁜 사제들을 추종해서는 안 됩니다. 사제들이 새로운 혁신을 가르칠 때, 그 나쁜 사제들을 신자들이 따라서는 안 되고 이들 나쁜 사제들, 성직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직하게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배교는 실로 심히 엄중한 죄입니다: 천주님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배교의 원인은 흔히 세속적인 것을 사랑하고 교만함 때문에 일어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말씀하시길, “불신의 죄는 교만에서 일어나니, 사람이 자기의 지성을 신앙의 법칙과 그리고 교부들의 건전한 해석에 대해 복종하지 않으려는 데에서 일어난다”[2]

신앙이 영적 생활에서 첫 번째 덕목이고, 또한 모든 다른 덕행의 뿌리이기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단과 배교는 아주 심각한 죄이지만 신앙에 대한 무지 역시 매우 위험스런 것이기에,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진 이들에게 자비를 가져야 하고, 신앙 전파에 대한 열정으로 저들에게 신앙의 빛을, 영혼들이 우리 주님에게 회개할 수 있는 전교의 열정을 , 그리하여 저들이 이런 위대한 신앙이 가져다 주는 천국의 보물을 나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신앙의 위대한 모범은 “지극히 충직하신 동정이신” -“Virgo Fidelis –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성 엘리사벳이 이렇게 성모님께 외칩니다: “주 네게 말씀하신 바는 다 이룰 줄로 믿으셨기에 너 복되도소이다”(루까1:45) 성모님은 충직한 동정녀이고 선한 천신을 믿었으며, 불충했던 동정 이브가 행했던 것, 즉 “네가 저 과일을 먹으면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천주님의 말씀은 믿지 않고 오히려 뱀의 말을 듣던 이브의 과오를 보상하였습니다. 우리 성모님은 신앙과 묵상의 아름다운 모범이니, 성모님은 아기 예수를 볼 때마다 천신의 말 “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을 기억하였고, 천주이신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아래에서 조차 주님께 충직하면서 신앙의 행실을 다했으니, 그곳에서 성모님은 예수님이 과거에도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었던 것을 계속 믿었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천주의 말씀이자,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비추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적 생활의 으뜸가는 덕목입니다. 참된 신앙은 천주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우리가 영원한 지복직관을 천국에서 누리게끔, 그리하여 천주께서 우리를 몹시 사랑하사 그분의 사랑하는 독생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죄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고, 우리가 천국에 가도록 힘을 불어 넣어주시는 점을 보증하신다는 그 목적에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그래서 신덕은 천주님을 바라는, 천주님을 직접 뵙는 지복직관을 갈망하게 하는, 영생을 갈망하는,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인하여 우리가 천국에 있기를 바라는 망덕으로 이끕니다.


망덕이란 두 번째 신학상의 덕목입니다. 망덕은 천주님을 모두 지향합니다. 우리의 이곳 지상 생활은 우리가 살베 레지나 Salve Regina 에서 노래하듯이   “눈물의 계곡”에서  “귀양살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곳에서 영원히 살 것같이 정착하려 한다면 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요? 우리는 아주 잠시 임시로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모든 생애는 천국을 준비하고 천국을 향해 모든 것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망덕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름다운 방법으로 우리마음을 천주께 향하도록 이끕니다.

망덕에 대해 으뜸가는 죄는 절망입니다. 절망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좋은 일을 하려 하다가 실패하여 포기할 때 흔히 일어납니다. 또는 기도하고, 이런 저런 유혹을 이기기 위해 천주님의 은총을 요청했지만, 그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을 못 참거나 또는 이런 저런 세속적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애착을 버리지 못할 때 생깁니다. 그래서 이러한 원치 않는 것 때문에 그는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은 실제로 말씀하시길; “너희 중에 누구든지 가진 바 모든 것을 버리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 되지 못하리라.“(루까14:33) 천주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천국에서의 복락, 천주님을 직접 뵙는 지복직관을 주시지만, 우리가 대신에 그 대가를 치르려야 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즉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천주께 “예”하는 것은 한계가 없어야 하고 무조건적이야 합니다. 천주님의 성총에 전적으로 항복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그분의 성총과 도우심의 효험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천주께 완전한 굴복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유혹에서 자신의 무력감을 보게 되고, 쉽사리 죄에 떨어지게 되고 그래서 절망에 의해 유감을 당합니다.


어거스틴 성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탁월한 의사로 비유합니다. 환자라는 사람은 의사의 처방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환자는 치유가 될 리 없습니다. 절망이란 그 자체 엄중한 죄입니다. 더욱이 이 절망은 모든 종류의 유혹에 영혼을 굴복하게 이끌고 자기 자신을 온갖 악덕, 흔히 저급한 악덕에 던져버리기 때문에 매우 위험합니다. 그 치료제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천주께 돌아오는 것이니, 그러면 그분은 그 영혼을 깨끗이 하고 치료할 것입니다.

망덕에 대한 두 번째 죄는 멋대로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망덕이 과도(過度)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천주님을 너무 많이 신뢰한다든지, 천주님의 도움에 너무 의지한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망덕의 왜곡입니다. 죄를 멀리 하도록 인도(引導)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순종하는 대신에, 억측이란 자신이 죄에서 빠져 나올 필요가 없으며 여전히 천국에 갈 수 있는 척하게 합니다!


억측의 죄는 개신교인들에게 흔한데, 그들은 자신이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이미 구원받았다”거나, 계명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거나, 자기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천국에 확실히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억측을 부리는 현대주의자들의 모양새는 “천주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이기에 천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간에 항상 용서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망덕의 왜곡이며, 천주님께서 거룩하시기에 우리도 거룩하길 원하시는 그분의 신성함을 완전히 무시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영혼 안에서의 은총의 작용에 반대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존하기보다는 저항하게 합니다. 억측은 망덕이 과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망덕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매우 위증(危重)한 죄로서, 많은 다른 죄로 이어지게 합니다.


망덕의 훌륭한 본보기는 성모님입니다. 특히 종도들이 우리 주님을 저버렸을 때, 십자가의 발치에 계신 성모님은 계속하여 신실(信實)하셨고 예수님의 부활에 여전히 희망(希望)을 가지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십자가의 발치에 제일 먼저 계셨지만, 주님의 성시(聖屍-시신)에 바를 향유를 사러 갔던 여성들 사이에 끼지 않으셨던 이유가 이것이니, 즉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아셨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진복팔단에 대한 희망은 영혼을 사랑(charity)의 미덕으로 이끕니다. 그것은 영적인 삶의 궁극적 미덕이며, 천주님과 연합하는 미덕입니다. “천주는 사랑이시니라. 사랑 안에 머무는 자는 천주 안에 머무르며 천주 또한 저 안에 머무르시니라.”(요한1서 4:16) 자비는 우리로 하여금 천주님 그분을 위해 사랑하게 만들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기뻐하도록 만듭니다. 성영의 작가가 말하듯:“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리니”(시편 104:34) “주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주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시편 37:4)

사랑은 가장 위대하고 첫째가는 계명의 대상이요 목표입니다. 어느 날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스승이여, 법률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주 천주를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신과 온전한 뜻으로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는 가장 크고 제일 으뜸   계명이요, 제 2위는 이와 같으니, 곧 남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모든 교법(敎法)과 선지자의 글이 이 두 계명에 달렸느니라. (마태오 22:36-40)


신덕은 망덕으로 이끌고, 망덕은 애덕으로 이어집니다. 신, 망, 애덕이란 세 가지의 신학상의 미덕이고, 그것으로써 우리가 성 삼위일체에 대해 이 땅에서 묵상하고, 천주님의 진리를 사랑하며, 천주님의 빛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성 바오로가 이르기를, “지금 이 지상 생활에는 신, 망, 애의 이 셋이 있으나, 그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니라.”(코린토 전 13:13) 정말로, 애덕없이, 신덕과 망덕 만으로는 천국에 가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똑같이 바오로 성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나 설령 건설적인 설교의 특은을 가지고, 모든 신비를 알고 온갖 인식을 가질지라도, 나 설령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신앙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을진대 아무것도 아니로다.”(코린토 전 13:2) 사랑 없다면 심지어 자연스런 선한 일들도 구원에는 쓸모가 없습니다. “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내 몸을 불사름에 붙인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을진대, 내게 아무 유익도 없으리라.” (고린도전서 13:3)


애덕은 놀라운 미덕이며, 그것은 우리가 천주님을 위해서 만물 위에 그분을 사랑하게끔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신의 큰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베퍼 주신 성신으로 말미암아 천주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주입되었느니라.”(로마 5:5) 그리고 성신께서는 영혼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분은 “성화(聖化)시키는 분”이십니다. 애덕으로 인해 모든 것이 사랑으로 변화되고, 모든 매일의 행동이 천주님께 달콤한 향기가 나는 제물(祭物)로서 바쳐집니다. “너희는 천주의 사랑하시는 자식답게 저를 모범할지어다. 또한 너희는 그리스도 너희를 사랑하사 당신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으로 삼아 우리를 위하여 천주께 드리셨음과 같이 사랑 안에 거닐을지니라.”(에페소 5:1-2) 따라서 애덕은 가치있는 것의 근원이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영원한 상을 얻게 합니다. 애덕으로 행하는 것은 심히 천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애덕은 영혼이 기도하고 묵상하게 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삶의 심장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께서 진정 우리 안에서 거(居)하십니다. 우리는 “성신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고” 이에 따라서 진실로 “천주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로마 8:14) 애덕은 모든 계명을 실현하고 충족하게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요왕 14:15) 계명을 지키는 것은 애덕의 요구 사항입니다. “내 계명을 가져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성부께 사랑함을 받을 것이요, 나도 또한 저를 사랑하고,또 저에게 나를 나타내어 보이리라.”(요왕 14:21) “누 만일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준행할 것이니, 성부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또 우리 등이 저에게 와 한가지로 거처하려니와…”(요왕 14:23)


천주님께 대한 사랑은 천주님을 위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천주를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兄弟)도 사랑할지니라 함은 이 우리가 저 천주에게로부터 계명(誡命)으로 받은 것이니라.”(요한1서 4:21)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이웃에게 천주님께서 계시길 원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이웃 사람 안에서 다스리시기를 원하게 됩니다. 우리 이웃이 천국의 영원한 복을 받길 원하게 됩니다.


토마스 성인이 이것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우리는 “ut in Deo sint – 그들이 천주님 안에 있기”- 를 원하게 됩니다. 정말로 “사람이 만일 보천하를 다 얻을 지라도 제 영혼에 해를 받으면 무엇이 유익(有益)하리요? 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영혼을 다시 물러내겠느냐?”(마태오 16:26) 그러니 우리가 이웃에게 온 세상을 주고서라도 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갖지 못하면, 그들의 영혼 속에 천주님이 없다면, 우리 이웃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결코 자기 중심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웃 사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관인(寬忍)하고 어질도다. 사랑은 투기(妬忌)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거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지 아니하고 사익(私益)을 도모하지 아니하며, 노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즐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진실을 즐기며,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인내하는 도다..” (코린토 전 13:4-7)


어떠한 대죄든 간에 다 애덕과 반대되며, 서로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몇몇 대죄는 이 위대한 미덕에 직접적으로 반대됩니다. 천주님을 미워하는 것이 최악(最惡)입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미움이 더 흔하며, 명백히 애덕과 조화를 못 이루고 양립(兩立)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들이 첫 번째 계명의 내적인 의무입니다. 이 계명은 진정 생명의 계명이며, 그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영적인 삶은 영원한 삶의 시작이 됩니다. 지구 상에서의 신덕, 망덕, 애덕의 삶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꽃필 것입니다. 그 영적인 삶의 양식은 성체입니다. 이 가장 훌륭한 성사를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의 몸과 피와 영혼과 신성성(神性性)으로 먹이십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서 더 더욱 살아나시고, 우리가 그로써 더욱 더 주님 안에서 살게 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게 거하고 나도 저에게”(요왕 6:57) 또한 “천주는 사랑이시니라. 사랑에 머무르는 자는 천주 안에 머무르며 천주 또한 저 안에 머무르시니라.”(요한1서 4:16) 그리고 “우리에게 대한 천주의 사랑은 천주 우리를 당신 독생 성자로 인하여 살리시고자 저를 세상에 보내신 여기에 나타나셨느니라.” (요한1서 4:9)


복되신 동정녀여, 당신께서 행하신 바대로, 천주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시며, 우리가 완전히 그분을 위해 살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를 우리가 알도록, 그리하여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당신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성 비오10세회 아시아 관구 소속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