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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신은 누구이신가?- 성신강림절(2016-05-15)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5-16







성신은 누구이신가? - 성신강림절(2016-05-15)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성신강림 대축일인 연고로, 다음 방문 때에 십계명에 대한 마무리 강론을 하도록하겠습니다.

 가톨릭 신경에서 성신은 “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신 분, Dominum et Vivificantem”이라 고백을 하는 데, 이는 아주 중요한 진리이며, 각각 모두, 우리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씀하시길, “나는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또한 더 풍성히 얻기를 위하여 왔노라.“(요왕10:10) 또한 이르시길,”성신은 생명이로되“(요왕6:64) 그리고 바오로 성인은 코린토인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성신께서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코린토 후3:6)

 성신께서는 어떤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까? 궁극적으로 ‘영생’을 주시지만, 그 영생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실제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씀하시되:”천주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당신 독생 성자를 주시기까지 하사, 무릇 저를 믿는 자로 하여금 멸망치 아니하고 오직 영생을 얻게 하셨으니“(요왕3:16) 이것은 이미 시작되었고, 참으로 “성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되(현재시제입니다), 성자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얻어 보지 못하고 오직 천주의 의노(義怒)를 제 신상에 당하느니라.“(요왕3:36) 그리고 그 후 카파나움에서 우리 주님께서 이르시길,”나를 보내신 내 성부의 의향은 이것이니, 곧 성자를 보고 믿는 모든 이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함이요, 또 나 저들을 끝날에 부활케함이니라...나 진실히 진실히 너희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노니”(요왕6:40, 47)  그는 이미 영혼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그의 육신이 부활할 것이라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영생을 바라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요? 지나가 버리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 무슨 유익이있을까요?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그 생명은 참으로 유익한 것이고, 성 아우구스티누스 말씀하시듯이 무지 가운데 보내거나 영생을 경시한다면 그 생은 진정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영생은 그 누구도 혼자서 얻을 수없거니와, 그 누구도 자기 힘으로 영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자연히 죽기 마련이고, 죄로 벌을 받게됩니다. “죄악의 보수(報酬)는 죽음이로되, 천주의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받는) 영원한 생명이니라.“(로마6:23) 이것은 천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천주님의 바로 그 생명 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성인께서는 진정으로 말씀하시길,”이러한 것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위대하고 존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주심은 이 너희로 하여금 이를 인하여 세속의 육감적 쾌락과 및 부도덕함을 피하여 천주성에 참여하는 자 되기를 위하여 하심이니라.“(베드로 후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래서 영생을 이렇게 묘사하십니다.”만민이 너 하나이신 참 천주와, 너 보내신 바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이것이 곧 영생이로다.“(요왕17:3) 천주님을 알기 위하여, 천주님을 대면(對面)하기 위하여, 영원한 묵상생활을 위해서입니다! 성 요한은 서간에서 이르시길:”성부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셨는지를 너희는 볼지니, (곧) 우리는 천주의 자식이라 일컬음을 받고 또한 사실로 그렇게 되었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세속은 우리를 모르노니, 대저 그는 천주를 모르는 연고(緣故)니라. 친애하는 자들아, 우리는 이제 천주의 자식이로다. 우리가 장차 무엇이 될 것인지는 아직도 명백하지 않으니라. 그러나 이것이 명백(明白)하여질 때에는 우리는 천주와 비슷할 것을 아노니, 대저 사실대로의 저를 뵈올것임이니라. 무릇 이러한 희망을 제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자는 저 거룩하심과 같이 자기를 (또한) 거룩하게 하느니라.“(요안1서3:1-3) 이것이 영생입니다.” 우리는 천주와 비슷할 것을 아노니, 대저 사실대로의 저를 뵈올 것임이니라.“ 그리고 이것이 생명의 기부자이신 성신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성세때에 받게 되는, ‘물과 성신으로 다시 태어나는’(요왕3;5)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견진성사로 강화되는데, 견진성사는 우리 각자를 위해 우리 영혼 안에 성신이 오시는 겁니다. 이 생명은 고해성사로써 양육되며, 보속의 성사로써 치료되는데, 주께서 종도들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세우신 것입니다. “성신을 받으라, 너희들이 사람의 죄를 사한즉 사해질 것이요, 사람의 죄를 머무른 즉 머물러 있으리라.“(요왕20:22-23) 이 생명을 위해서 마지막 준비과정으로 종부성사를 주십니다. 이것은 바오로 성인께서 말씀하신 생명입니다:”저 죽으심은 죄 때문에 첫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죽으셨으나, 저 살으심은 천주를 위하여 살으시니라.“(로마6;11) 영혼의 생명, 초자연적인 생명,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 천주님의 자녀가 되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성신의 선물입니다:”천주의 성신께 격려되는 이는 다 천주의 자녀인 연고니라.“(로마8:14)

 자, 이 생명이 우리 영혼 안으로 내재하는 진정한 생명입니다. 토마스 아퀴니스 성인은 이 생명은 특별한 은총, ‘성화시키는 은총’이라 부르는 그 안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이 우리의 ‘영혼’입니다. 영혼은 우리의 몸을 보이게 하고 우리의 몸과 결합되어 우리의 인간 실체를 형성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집니다. 영혼은 육체의 생명과 함께 합니다. 우리 몸을 움직이게 하며 몸을 보이게 합니다. 영혼이 없는 몸은 단지 시체에 불과합니다. ‘성화시키는 은총’인 초자연적 생명은 또 다른 실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실체를 천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만드는... 끌어올려주는 선물입니다.

 진정으로 성화은총으로부터는 신덕, 망덕 그리고 애덕이라는 성서신학의 덕행이 흐릅니다. 우리 본성이 할 수있는 데까지 탁월한 방법 안에서, 우리가 천주님을 닮아가게 하는 그 안에서 그리고 “우리는 천주와 비슷할 것을 알고, 사실대로의 저를 뵈올 ”천국생활을 우리에게 준비 시킴으로서 우리가 천주님을 알고, 신뢰하고, 사랑함으로써 그러한 덕행을 갖게 됩니다.

 피조물로부터의 인식을 통하여 이성은 천주님에 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고 거기에는 으뜸인 1차 존재, 모든 다른 이들... 등등의 원인이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다른 철학자들은 천주님의 존재와 그분의 특성을 적절히 증명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신정론이라 부르는 철학의 최고봉입니다. 만약 이성만으로 천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에 관련된 어려움 때문에, 극소수만이 오랜 새월 후에 이러한 수준에 오류없이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앙으로 인해 교리문답을 첫 해에 배운 어린 아이는 이보다 확실성을 가지고 오류도 없이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 및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의 바로 그 내적 생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 천주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 인간 생명의 목적, 그리고 천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길을 압니다! “우리야말로 우리에게 대하여 가지신 천주의 사랑을 인식하고 믿은 자니라.“(요안 1서 4;16) 이것은 진정으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마음을 비춰주는 위대한 빛, 천주님의 빛의 반영입니다:”가리우지 않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은 다 이 우러러봄으로써 항상 더욱 영화(榮華)롭게 (주와) 동일한 모상으로 화(化)할 것이니, 이는 주의 성신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니라.“(코린토 후3;18) 이것은 묵상의 열매이며, 지극히 가룩하신 성 삼위께 대한 사랑스런 신앙의 얼굴입니다.

 “신앙으로 말미암는 의인은 살리라.”(로마1;17) 즉, 의인은 천주님의 빛 안에서 영원한 빛 안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신앙의 빛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생활의 중요한 선택에서, 생활 상태의 선택에서, 훌륭한 혼인 선택에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선택 등에서 특히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나의 부친은 집에다가 텔레비젼을 소유하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선택을 하셨는데, 이 선택은 (가톨릭) 신앙에서 기인한 것인데 올바른 선택이었습니다. 우리 집에 텔레비젼이 있었더라면, 나의 부친께서는 자녀들 가운데 세 명의 사제를 갖질 못했을 것입니다.

 천주님을 바라지 않고서, 그분을 그리워하지 않고서 천주님을 묵상할 수 없습니다. 성영의 저자는 이르길;”나는 주께 한가지 청이 있어 그를 찾사오니, 곧 나의 온 평생 주의 땅에 거처하며, 주님의 자애(慈愛)를 누리고, 그이의 성전을 우러러봄 그것이니라.“(성영26:4,8) “내 마음은 당신께 말씀 아뢰고, 내 얼굴은 당신을 찾나이다. 주시여, 나는 당신의 얼굴을 찾나이다.“(성영72:28) “너희는 주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아모스5:6) “천주의 곁에 있음이 천주신 주께 내 피신처를 둠이 내게는 좋으니다.“너희는 주와 그이의 능력을 고려할 것이며, 그이의 얼굴을 항상 찾을지어다.“(성영104:4) 그 얼마나 극소수만이 주님을 찾으며, 주님을 그리워하며,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 할 영생을 갈망합니까? 참으로 극소수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천주님께 갈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 친히 우리에게 언약하신 바는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안1서2:25) 저 언약에 의지하여, 천주님의 도우심에 의탁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가 그 곳에 도달할 희망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덕행과 우리의 공로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덕행를 실천하지도 않고 공로도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발자취’ (베드로 전2:21)를 따라야 합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운 데 행치 않을 것이요, 오직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왕8:12) 진실로, “말로는 스스로 저를 인식하였다 하면서 저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을 말하는 자이며, 그 안에 진리가 있지 아니하리라.“(요안 1서2:4)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존하여 우리가 천주님의 계명을, 생명의 계명을 지킵니다. 개신교인들은 언약과 공로를 반대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둘 다 믿으니, 왜냐하면 성서는 두 개를 다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은총으로부터 피워 오르는 세 번째 덕행은 사랑의 덕행입니다.”우리에게 베퍼주신 성신으로 말미암아 천주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주입(注入)되었느니라.“(로마5:5) 사랑은 영적 생명의 핵심(核心)이며 초자연적인 생명의 핵심입니다. 이 생명은 성화 은총과는 필연적으로 묶여 있습니다. 만약 어떤 이가 은총이 있다면, 그에게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에게 사랑이 없다면 성화 은총도 없습니다. 대죄는 사랑을 쫒아내기 때문에 은총을 파괴합니다. 만약 대죄를 지어 은총을 잃어버리면, 그가 항상 신덕과 망덕을 잃는 것이 아니라, 애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천국(天國)에 갈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데 지옥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뜻과 온전한 영신과 온전한 힘으로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듯이”(말구12:33) 천주님을 사랑합니다. 성 요한이 언급했을 만큼 사랑은 진정으로 천주님의 생명에 참여(參與)하는 것입니다. “천주는 사랑이시니라. (그런즉) 사랑에 머무르는 자는 천주 안에 머무르며 천주 또한 저 안에 머무르시니라.“(요안1서4;16)

 바오로 성인께서 말씀하시듯이 사랑이 없이 믿음 하나만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나 설령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신앙이 있다할지라도 사랑이 없을진대 아무것도 아니로다.“(코린토 전13;2) 천주님 눈 안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랑으로 말미암아 활동하는 신앙”(갈라타5:6)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행하는 것”(에페소4:15)입니다. 토마스 성인은 사랑이란 ‘덕행을 이루는’ 것이라 가르치는데, 사랑은 각 덕행에게 올바른 동기, 올바른 궁극적인 목적인... 즉, 천주님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활동을 끌어와 천주님을 향해서 일치시키며 천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의 모든 동기가 되도록 합니다. 바오로 성인 이르시길, “너희가 무엇을 하던 간에 다 천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라.“(코린토 전10;31)

 성화 은총으로부터 모든 다른 주입된 덕행이 흐르고 이를 강화시키며 모든 다른 영적생명을 끌어올립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계명의 실천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내 계명을 가져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요.“(요왕14:21) 예를 들어, 정의를 실천하려는 자연스런 덕행은 우리로 하여금 정직한 생활로 이끌며, 초자연적으로 결합된 정의의 덕행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와 세상의 죄에 대해 보속과 배상을 하도록합니다. 자연적인 정결의 덕행은 혼인 생활에서 충직하게 하고, 초자연적인 정결의 덕행은 일생동안 지속된 봉헌(奉獻)된 동정 생활 (사제나 수사의 길)을 택합니다. 자연스런 강용(剛勇)의 덕행은 어려움에 있을 적에 용기를 주고, 초자연적인 강용의 덕행은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치명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주입된 덕행,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더 높은 덕행은 생명을 주시는 성신의 결과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러한 덕행들을 “성신의 열매”이라하는데, 성신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애, 인자, 충실함, 유화, 공순, 절제, 정결“(갈라타 5;22-23)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높은 덕행은 진복팔단(眞福八端)에서 특히 분명해집니다:”마음이 가난한 자는 진복자로다.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요. 양선한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땅을 차지지할 것임이요, 우는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위로함을 받을 것임이요, 의덕을 주리고 목 말라 하는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애긍하는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애긍함을 받을 것이요, 마음이 조촐한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천주를 뵈올 것임이요, 화목하는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천주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군난을 받는 자는 진복자로다,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요, 사람이 나 때문에 너희게 악담하고 너희를 핍박하고 모든 악한 것으로 너희를  거슬러 망증하면 너희가 진복자되리니, 즐거워하고 용약하라. 너희가 풍성한 상급을 하늘에서 받을 것이니, 대개 너희보다 먼저 있던 선지자들을 이와 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테오5;3-12)

 참으로 천주께서는 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생명을 주신 성신에 의해 부여된 첫 번째 원리이자 마지막 원리입니다. 그리고 저 초자연적인 생명의 참으로 놀라운 측면이 있으니, 그것은 의인의 영혼 안에 ‘천주 제3위께서 거처’ 하신다는 겁니다. 천주 제3위격은 의인의 영혼 안에 거하시는 특별한 현존이요, 사랑스런 현존이십니다. 진정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르시길:”내 계명을 가져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성부께 사랑함을 받을 것이요, 나도 저를 사랑하고, 또 저에게 나를 나타내어 보이리라.“(요왕14:21) 그러니 성 유다 (주: 예수님을 판 유다가 아님)가 주님께 묻기를,”주여, 어찌하여 당신을 우리에게는 나타내어 보이시고, 세속에는 나타내어 보이시지 아니하시겠나이까?“(요왕14:22) 주께서 대답하십니다. “누 만일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준행할 것이니, 성부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또 우리 등이 저에게 와 한가지로 거쳐하려니와...“(요왕14:23) 그래서 성부와 성자께서는 거처를 만들어 주님(성부,성자,성신)을 사랑하는 영혼 안에 거하십니다. 영혼의 가장 비밀스런 안식 안에서 천주이신 성부와 성자, 그리고 또한 천주이신 성신께서 성부와 성자와 분리될 수없는 가운데 그 영혼 안에 거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성 바오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천주의 성전이요, 천주 성신이 너희 안에 거처하심을 알지 못하느냐?“(코린토전3;16) “너희 육신은 천주로 부터 받은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신의 성전이며,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느냐?“(코린토 전6:19)

 진정으로 천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기도는 우리가 우리 안에 거(居)하시는 이러한 천주 현존을 깨달을 때 매우 친밀해집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것을 우리 안의 ‘예수의 생명’이라 부릅니다. “예수의 죽으심의 고난을 언제나 우리 몸에 지니느니, 이는 예수의 생명으로 하여금 우리 몸에도 또한 나타나기를 위함이니라. 대저 우리는 살아왔으면서 언제나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붙여지느니, 이는 또한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신에 드러나기를 위함이니라.“(코린토 후4;10-1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 특히 그분의 희생 안에서 “예수의 죽으심의 고난을 언제나 우리 몸에 지님으로써“, 바오로 성인은 저 ‘우리 몸 안의 예수의 생명’을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 몸에도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이 우리 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사십니다. ”그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내 안에 살으심이니라.“(갈라타2:20) 인간의 친교는 결코 같은 지속적인 연대, 같은 친밀감, 같은 정신적 유대감의 상승을 갖질 못합니다.

 천주께서, 천주 성삼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어찌 우리가 잊을 수 있겠습니니까? 그러니 결코 우리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대죄로 인해 그 죄인은 천주님을 자기 영혼에서 쫒아냅니다! 천주께서 떠나시는 것은 대죄의 엄중함이 가져오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대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에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우리에 대한 천주님의 선하심과 관대하심을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더욱 대죄를 피해야만 합니다. 대죄는 참으로 지옥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기에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대죄도 절대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짓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소죄조차도 피해야 하며, 비록 우리의 연약함이 모든 죄를 피하진 못하더라도 죄를 이기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니 자주 고해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위대한 성사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사입니다. 참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게 거하고 나도 저에게 거하며, 마치 생활하시는 성부 나를 보내시매 내가 성부를 말미암아 삶같이, 나를 먹는 자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는 하늘로조차 내려온 바 떡이라. 너희 조상들이 먹은 만나와 같지 아니하니, 이는 먹고도 죽었으되,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왕6:57-59)

 저러한 천주님의 사랑의 생명은 반드시 우리 이웃에게 흘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주 우리를 사랑하심이 이와 같으신 즉, 우리도 마땅히 서로 사랑하여야 하리로다.“(요안1서4;11) 이것이 바로 주님의 교훈입니다:”너희게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곧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마치 내가 너희를 사랑함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할지라.“(요왕13:34) 그리고 사랑에서 오는 모든 착한 행실은 이러한 아름다운 샘에서 나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저 초자연적인 생명으로부터 살아온 분이 있다면 , 그분은 바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성모님 안에는 분명 성신의 결과가 있으니 성신은 성모님을 감쌌고, 그리하여 성모님은 태중에서 영원한 생명(요안1서5:20)이신 천주 성자를 잉태하셨습니다(루까1:35) 생명이신 성신의 작용으로 인하여 잉태하셨고, 성 이냐시오가 성모님을 부르신 것처럼 또한 그분은 십자가 아래에 계신 새 이브가 되셔서 ‘산 자의 모친’(창세기3:20)이 되셨습니다.

 천국에 계신 천주 성자께서 성신의 작용으로 인하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지극이 깨끗하신 태중에 오셨듯이, 매 미사때마다 사제가 (경문의) 소리로서 나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능으로 인해, 그리고 성신의 권능으로 인해 주님은 다시 제대(祭臺)로 내려오십니다. 구약에서 천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적에 거룩한 구름이 장막을 감쌌듯이, 천주 성자께서는 미사 때 축성(祝聖)되는 그 순간 내려오실 적에 성신께서는 제대를 감쌉니다. 매 미사때마다 이루어지는 이러한 천주 신비에 대해 우리가 집중을 얼마나 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이 성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에서 듣지도 못한 변혁된 생명이 아니고, 새로운 관습도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성령 운동가’라 부르고, 평신도의 손에 대고 안수하며, 혀로 방언을 하고...등등 성신을 받은 것처럼 행세합니다. 이러한 성령 운동은 개신교에서 시작된 것이지 가톨릭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마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는 신앙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구분을 두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인하여 저들은 ‘진리의 영’(요왕14;17)이신 성신에 의해 감도(感導)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천주님의 진리는 영원하니다.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또한 영원(永遠)토록 같으신 자로다.“(헤브레아13:8) ”나는 천주다. 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말라기3:6) 성신은 종도들이 가르친 것이 아닌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부 내 이름을 위하여 보내실 바라글리도 성신이 너희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실 것이요, 또한 내가 너희게 말한 바 모든 것을 너희게 깨우쳐 주시리라.“(요왕14:26) 성신은 새로운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깨우쳐 주시고,” 그리고 가톨릭 전통(傳統)으로서 수세기에 걸쳐 우리에게 전승(傳承)되어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전혀 행해지지 않는 안수(按手)로써 성신을 주는 척하는 이것은 여덟 번째 성사(聖事)를 주는 것처럼 같아져있습니다! 뜨리덴틴 공의회가 결정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칠성사이지, 팔성사가 아닙니다. 이미 성사 하나가 있으니, 이 성사는 주교의 안수로써 이마에 성유를 발라 성신을 주는 것 (주: 견진성사) 입니다. 그 누구도 줄 수 없고, 평신도도 줄 수 없고 오직 주교만이 줄 수 있는 이러한 성사는 성유(聖油)를 사용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이것은 성령 운동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령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하지 못한 것을 저들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마가 주님이 행하신 것을 거짓으로 만들면서 천주님을 흉내내고 그분을 모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더러운 영이며, 거짓말장이고, 지극히 교활한 기만자인 거짓의 아비입니다.

 성인들께서 사셨던 것처럼, 가톨릭교회가 수 세기 동안 가르쳤던 처럼, 초자연적인 삶을 살면서 그분들을 닮으면서 성신에 충실하게 남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성신의 궁극적인 선물인 영생에 도달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성모님과 모든 성인들과 함께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를 묵상하도록 합시다.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