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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비오10세회(SSPX)회와 성베드로회(FSSP)의 차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8-01



 



성비오10세회와 성베드로회의 차이

 


SSPX와 FSSP의 기본원리에 관한 사항 

 

1988년이 SSPX와 FSSP의 이 두 단체에 의해 이중으로 기념되는 것은 이들이 왜 분리되었는지? 분리되어진 결과는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 가짜이유: 교황의 승인 

 

어떤 이들은 성비오10세회(SSPX)는 교황의 승인을 얻지 못했지만, 성베드로회(FSSP)는 승인을 얻었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들(FSSP)은 성비오10세회(SSPX)를 십 여년, 즉 1976년전이나 최소한 1976년에 떠났어야만 했다. 실제로 이미 그 당시 르페브르 대주교는 신앙에 대한 전대미문의 공격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해 받았던 가톨릭 신앙과 모든 시대의 가톨릭 전례를 계속 전하기 위해서는 불순명의 모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에 있었던 서품식 때의 강론을 기억해보라. 실제로 Bisig 신부는 12년간 성비오10세회(SSPX) 안에서 교회의 사제직을 위해 그밖에 많은 일을 헌신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그는 이 같은 필요 조치에 부여된 모든 원칙들에 분명히 동의한다.

 

• 진짜 이유: 아씨시 사건에 의해 높아진 신앙의 위기 - 그래서 참된 가톨릭 신앙을 전할 주교성성의 필요성 

 

프란체스코 교황이 희년에 성베드로회(FSSP)로 보낸 메시지를 본다면, 1988년에 일어난 아씨시에서의 ‘성교회의 커다란 사건’이 오로지 그 분열의 원인이라고 하는 데, 왜냐하면 FSSP는 ‘화해의 사명’을 받아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인가?


오히려, 그 당시 ‘성교회의 커다란 사건’은 -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 1986년 10월 아씨시의 여러 종교 지도자들의 에큐메니즘 모임으로 인해 보다 정교하게 조성된 신앙의 위기였기 때문이다. 이 모임은 의심의 여지없이 1988년 6월, 네 명의 주교를 성성한 주요한 이유이다. 이 엄청난 추문(아씨시 모임)에 직면하여, 강력한 치료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교황이 몸소 그와 같은 나쁜 표양을 보일 때, 신자들에게 타협하지 않는 주교들을 공급함으로서 모든 시대의 신앙에 충성하는 신자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베드로회는 자기들이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동의된 같은 ‘의정서’를 지키고 있다고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 아마 그 의정서가 SSPX를 위한 1명의 주교를 허가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요점이라는 단순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는 분명 아니다. 1명의 주교를 성성 하는 문제는 교황에 의해 이미 수락된 것이며, 오직 그 실제적 적용에 있어서 바티칸 관료들에 의해 끝없이 연기되었기에 실천이 불가능 했었던 것이라고 대주교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선한 주교들이 없다면, 신학교가 좋은 사제들을 양성할 수 없는 것이며, 서품식 때 서품을 주는 주교는 ‘너희가 이것, 저것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서품을 못 받을 것이요’ 라고 싶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신앙에 대한 싸움 - 2차 바티칸 공의회 오류에 어떻게 침묵할 수 있는가? 

 

성 베드로회가 이 위험으로부터 면책되지 않다는 것은 희년에 보낸 교황의 서신에서 분명히 들어난다.


“성베드로회는 전례성성(典禮聖省)과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교리가 들어있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문답의 방향을 (비판없이) 따라야만 되고,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와 이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합니다.”

 

• 만약 2차 바티칸 공의회와 새미사에 잘못이 없다면?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논리적으로 아씨시로 이끌며, 후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직접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침묵의 배교로 나아간다. 2차 바티칸의 주요 오류들 - 종교의 자유, 자유주의, 주교단체주의 그리고 에큐메니즘 - 은 초기 때부터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견책된 것들이며, 이 오류들은 많은 이들의 신앙을 조용히, 아니 매우 효과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중이다. 커져가는 세상의 이들 악에 대해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교회의 무능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오류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가톨릭신앙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왜 그런가? 신앙은, 가톨릭신앙은 유일한 참된 신앙인데,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천주님의 증언에 근거한 확실성(요한 1서5:10) 때문이다. 가톨릭 신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조항이다. 이 의무는 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확인하셨다. “성세를 받은 자는 구령될 것이요, 믿지 아니한 자는 저주를 받을지니”(마가16:16). 

 

어떤 개인의 주관적 신앙으로 생겨난 것으로는 부족하다. 객관적인 참된 신앙, 가톨릭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에 있어 오류의 문제는 중대한 문제이다. 이는 영원한 저주로 인도되는 심대한 악이다. 영혼구령이 시작되는 곳은 참된 신앙이다. ‘천주교회에서 무엇을 구합니까?’ ‘신덕을 구합니다.’ ‘신덕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만약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계명을 지키시오.’ 새 전례에서는 선택 조항으로 되었지만 위의 언급한 이것은 성세성사의 전통전례의 시작이다.


여러분은 참된 교회로부터 참된 신앙을 원하며, 이 참된 신앙이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끈다. -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다른 길은 없다! 왜냐하면 “천주... 모든 이가 구령되길 원하시며...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티모테오1서 2:2-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모든 이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 어느 누구도 ‘난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가 필요하지 않아.’  ‘나는 구세주가 필요 없어.’라고 말할 수 없다.  천주님은 우리에게 그 분의 계명을 거부할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순명할 자유를 주셨고, 그의 아들 우리 주 구세주를 거부하는 자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받아드리는 자유를 주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종교의 자유와 에큐메니즘은 가톨릭 신앙의 원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래서 수백만의 신자들의 신앙을 파괴하고 있다. 그 첫 번째 희생자가 성직자들이며, 특히, 가르침의 오류는 저(사제)들을 잘못된 오류의 첫 사상자로 만들고 있다.


 

교사가 가르치지 않을 때
  

 

가톨릭 성교회는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는 바, 즉, 교회를 가르치는 이들은 주교들과 교황이며, 저들의 조력자는 사제이고,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가르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앙의 위기는 신앙을 가르치려는 저들의 사명이 흔히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미 1960년대에 부모들은 교리문답이 변하는 것과 자기 자녀들이 더 이상 신앙을 적절하게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무서워했다. 쟝 마디랑이 교황께 요청한 것 중 하나는 “교리문답을 돌려 달라.” 였다. 어떻게 신자들이 교회에서 제대로 가르치는 성직자들의 가르침과 성직자들 자신의 견해(흔히 오류투성이고 심지어 이단적인)를 구별해낼 수 있겠는가?

 

 • 두 번째 차이점: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진실 혹은 과장 

 

SSPX와 FSSP가 근본적으로 결별한 두 번째 원리를 살펴보도록 한자. 이것은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이 교황좌(ex cathedra)을 정의할 때마다, “그는 오류로부터 보호되지 않는다.” 라고 정의하며, 이러한 정의가 일어날 때 인식할 네 가지 기준을 적절히 주고 있으며, 교회법은 현명하게 설명하길, “분명하지 않는 한, 이 네 가지 기준이 분명히 실현되지 않는 한, 그 어느 교리도 ‘정의(定議)’된 것으로 간주 되지 않는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 밖에서 교황이 그의 권위를 사용할 때 마다 오류로부터 보호되지 않거나, 권위의 적절한 사용에 있어 심지어 교황에게도 오류가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 1988년의 딜레마: 교황이냐, 전통이냐 

 

1988년에 성비오10세회(SSPX)의 모든 사제들은 두 인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제시된 두 중요한 원리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는데, 왜냐하면 교황은 대주교를 파문하겠다고 위협(실제로 했음)했기 때문이다. 교황 바오로 2세는 '베드로의 계승자에 밀착될 것'을 요구하였으며,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교회의 전통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당시 내가 보기엔 Bisig 신부 및 FSSP 공동 설립자를 포함한 SSPX 모든 사제들이 두 원리를 알고, 이 두 원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어느 누구도 아씨시를 원하지 않았고, 파문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제들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 파스칼의 도박 

 

몇몇 신자에게는 그 일은 공의회가 준 선물에 의해 매우 분명하게 들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고 겸손히 인정하는 바이다. 이 같은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 딜레마를 해결했다. 세상의 종말 때, 공심판 때 오직 네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르페브르 대주교는 그 어느 한 사람은 왼쪽이든, 오른쪽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오른쪽에 있으면 르페브르 대주교는 왼쪽에 있을 것이며, 르페브르 대주교가 오른쪽에 있으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왼쪽에 있을 것이다! 매우 단순하다. 거의 수학적 논리이다. 말하자면 둘 다 저주 받는다면, 나는 그래서 첫 번째 선택인 교황을 배제했다. 나 자신을 어디에 둘지 정말 몰랐다! 두 번째인 경우에 있어서 그 둘 중 누구를 따라도 위험은 없다고 말했으며, 아씨시의 교황 보다는 전통신앙에 충실한 주교를 따르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마지막 두 사례의 경우에 있어서, 한쪽이 왼쪽에 있고 다른 한쪽이 오른쪽에 있다면, 르페브르 대주교는 오른쪽에 있을 것이요, 요한 바오로 2세는 왼쪽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대주교는 온 생애 기간 동안 신자들에게 충실히 일해 온 사람이며, 그의 유일한 ‘흠’이란 성 교회로부터 받은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전달하려는 사람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인 반면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라면 언제든지 주교에 의해 견책 받을 만한 것이 분명한 에큐메니즘이라는 새로운 변혁의 일을 해 온 사람인데, 단지 교황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주교는 견책 속에, 교황은 오른쪽에 있게 될 것이라는 모순이 있게 된다.

  

• 사실들: 대주교는 왜 그의 결정을 내렸는가? 

 

후일, 내가 책을 내기 위해 르페브르 대주교 및 바티칸의 문서를 수집하면서 르페브르 대주교가 주교성성을 하게 된 이유를 점점 구체적이고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한편, 한 사람은 정결한 신앙과 그것을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다른 쪽은 – 대주교를 반박할 만한 문서가 없었음에도 - 대주교가 죽을 때까지 그들의 직위를 이용하여 주교성성을 연기하고 또 연장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5월 5일 저들은 주교를 성성할 권리를  대주교에게 주긴 했지만, 5월 6일 대주교가 이러한 좋은 결정이 더 이상의 연장 없이, 날짜와 구체적인 주교 한 명을 제시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주교성성이 실현되는 것인지 물었다. 24시간 후, 실제로 대주교는 주교성성 날짜를 받았다. (8월 15일인데, 이 날은 대주교가 언급했던 6월 30일의 마감 기한을 6주나 뒤로 미루어진 것이다)

 

또한, 답변 서신에는 또  다른 후보자들을 추천하라는 것이다. 대주교가 또 다른 세 명의 후보자 명단을 준비하도록 새로운 시간과 로마가 이를 검토할 시간이 주어지긴 했지만,  제시된 1988년 8월 15일까지 이를 끝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므로 로마의 의도는 '우리가  날짜를 주긴 하지만 우린 그 기간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니 또 연장될 것이오.’라는 의미였다.


그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대주교가 준 주교 후보자들을 저들이 반대한다면, 저들은 의정서 이전에 대주교에게 몇 달간 기한을 주었을 것이다! 저들은 주교성성 날짜를 여러번 연기했는데 (6월 30일은 네 번째 연기) 대주교는 더 이상 그런 로마의 장난에 놀아날 수 없는 것이다. 저들은 단지 연기만 하고자 했다. 대주교가 죽을 때까지....연장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로마는 정직하지 못했다.

 

• 그러나 교황에 관해서는? 

 

성베드로회(FSSP) 가운데 몇몇은 자신의 의지로 직접(motu proprio), 주님의 교회를 파괴(Ecclesia Dei Adflicta)하는, 오류가 없는 문장인 교리의 정의(定議)를 만들고자 하는 것 같았지만  많은 이유로 인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첫째, 이러한 자기 자신의 의지(motu proprio)에 의한 신앙 및 도덕에 관한 특별한 덕목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이런 말은 없다. ‘만약, 누가 이런 저런 이야기 하면, 그는 파문(저주)될 것이다 - 그리고 르페브르 대주교는 그렇게 말했으니, 파문(저주)받은 자이다.’
 

둘째, ‘정의(定議)된’ 것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파문 받은 것이다.’ 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러면 그것에 동의하지 않은 자에게도 인가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 같은 판단에 동의가 부과된 것이 아니며, 그러면 1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정의된 넷째 조건이 잘못되는 것이다.


셋째, 이것은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분명하게 제기된 필요성의 사례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어느 판단에 대한 적절한 판단도 변호를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단순히 정의(正義)에 거슬리는 것이다.

 

넷째, 만약 이 같은 ‘정의(定議)’가 있었다면, 로마의 그 어느 대학도 머레이 신부가 이에 반대하는 소장(訴狀)를 제출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쉽게 더 많은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 진정한 치교권? 

 

교황이 일상적 치교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교황 역시 때때로 무류성에 어긋날 수 있는가? 때에 따라서는 그렇지만, 그게 언제냐? 일상 치교권 가운데 무류성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이 같은 질문에 답변하는데 있어서 정말 조심해야 한다. 여기서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해 지나친 확대해석을 찾을 수 있는데 흔히,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해석상의 계속성에 이 뿌리에 두고 있음을 본다.


얼마나 저들이 이것을 과장하여 관철시켜 왔는지 이렇게 보여 준다., 새로운 관념을 도입하면서 이에 대해 어떠한 이의제기를 못하게 한다. 그리고 교황의 치교권 범주에, 그리면서 현대 치교권에 관한 모든 문서에 모든 2차 바티칸 공의회 내용을 넣는다. 저들은 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특별조항 아래에 들어가는 ‘진정한 치교권’에 대해 말하면서...


자, 그 어느 누구도 주교 - 그리고 교황 - 가운데 몇몇 평범한 일들(개인에 보내는 서간, 강론 등)과 보다 공식적인 일들(세상 모든 주교들에게 보내는 회칙, 교구전체에 보내는 주교의 사목편지, 주교들의 시노드, 공의회 등)은 분명히 더 중요하고, 그래서 ‘진정한’ 것으로 불리는 측면에서 ‘진정한’ 치교권의 관념을 받아드릴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이 진정한 치교권이 ‘무류하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 치교권이냐 판단이냐 

 

성교회는 특별 치교권과 일반 치교권을 구별했다. 그러나 1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확한 용어는 우리는 ‘천주의 계시로 믿어지는 숭고한 판단이나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치교권을 통하여 성 교회에 의해 제시된 신앙으로서 보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Denzinger [Dz.]1792) ‘일반적’ 치교권에 반대되는 것으로써 숭고한 판단들은 흔히 ‘특별’  치교권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치교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판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판단(판단의 행위)과 치교권 (교사/관리사로서의 행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판사는 각 문장의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가급적 간결하고 분명한 어휘를 원하며, 일단 선언하고 나면 반복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반복하지 않는 교사는 좋은 교사일 수 없다. 교사란, 같은 진리를 많은 방법으로 설명하고, 다각도로 들여다보면서, 사례를 보여주고 해석해 준다. 학생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얻고자 하는 것은 교사들의 모든 언어에 있어 흔한 일이다. (타락 이후 무지의 상처를 받은 인간에게 있어 최소한 그렇다).


• 숭고한 판단행위 

 

하급법원의 판단은 고등법원에 제소될 수 있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제소 될 리 없다. 성 교회에서, 최상의 판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께서는 그 분의 지상의 대리자인 교황이 ‘매고 풀고’할 때에, 최후의 판단을 할 적에 무류지권의 특전을 주셨다. 1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정의된 것처럼 저 무류성이 이와 같은 판단, 즉 지상의 최고판관으로서 (천국에 계신 최고 판관자의 대리자로서) 마지막 판결에 적용한다는 점을 보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다.

 

판사의 모든 판단이 다 최종판단이 아니다. 같은 판사가 일반적 판결이나 혹은 숭고한 판결을 할 수 있는데 오직 최종 판결만이 무류성을 지닌다. 무류성은 그의 판결문을 건내 주기 전에 그가 말하는 모든 단어나 생각이 아니라, 지상의 최고판사의 숭고한 판결문에 해당된다.

 

공의회는 숭고함을 지닌 전형적인 사례이긴 하나, 그 같은 공의회에 있어 문장(판결)이 없다면 무류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그 어느 누구도 견책하고자 원하지 않았고, 어떤 판결도 내린 것이 아니라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무류성이 아닌 것이다.


또한, 기준을 낮추는 바로 그 사실이 최고의 판결문(이는 마지막 때까지 성교회를 묶을 것인데) - 실제로 판사들은 신중한 행동이 요구되며, 최고의 판결에 대해 낮은 수준의 신중함을 가질 수 없다 - 을 주장하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무류성의 판결문은 개정할 수 없는 ‘그 자신(ex sese)’이 말하듯 1차 바티칸 공의회(Dz. 1839)는 그들에게 있어 다른 주장과는 독립된 것이다.

 

• 일반 치교권 

 

그와 반대로, 일반 치교권은 그 자체 무류성을 지니지 않는(not infallible ex sese): 즉 이는 분명히 이것은 재청원에 포함되는 가르침(치교권)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르침에 대한 합의 - quod ab omnibus, quod ubique, quod semper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항상 가르침이 되는 것 - 이것이 일반 치교권에 대한 진리의 기준이다.

 

가장 핵심적인 측면은 ‘항상 변함없이’에 있는데 실제로 성 교회의 가르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종도들, 그리고 그들의 계승자의 가르침의 지속성이 있는 만큼 그 안에 있는 진리이다. 만약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라면 진리이고, 만약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성 교회의 가르침에 속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항상 이단의 표시였다. 그것은 모든 것이 복음서에 ‘분명히 있다’ 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교리의 합법적인 발전이 있지만, 이는 변치 않는 신앙의 유산 안에 그 풍부함이 들어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불분명한 것부터 분명한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된 이래, 교부들로 전해진, 그리고 그 계승자들에게 전달된’ 신앙이다. 바오로 성인은 이것을 한 마디로 아름답게 요약한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천주님의 신비를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코린토 전서 4:1-2).


그래서 신앙은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행정가, 즉 사제들, 주교들, 그리고 그 위 모든 고위 성직자들, 교황에게 있어서 한 가지 자격이다. 저 신앙은 성 바오로께서 하신 다른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내 너희에게 전하는 것은 나 또한 받은 것이니, tradidi quod et accepi” (코린토 전서 15:3).

 

교황이 저 일을 할 때, 주교 또한 같은 일을 할 때, 그것은 신앙의 무류성을 가르치는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치교행위의 일부가 되지만 저들이 개별적으로 홀로 주장(ex sese)하는 것은 무류성이 되는 것이 아니요, 성 교회 내에서 항상 가르쳐진 진리와 일치는, 보편적 합의는 천주로부터 나오는 근원의 표시요, 그래서 무류성의 표시가 된다.


그래서 신앙은 일반적, 보편적 치교권의 기준이라 말할 수 있으며, 교황이 발언한 것이나, 주교가 말한 것이 저 일반적, 보편적 치교권에 해당이 된다고 인정되면, 그때서 ‘교황이 받은 바를 충실이 전하고 있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어느 고위 성직자의 가르침이 전통과는 분명히 다른 새로운 것이라면, 이는 보편적 (시간, 공간상) 치교권에 ‘적합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 성직자는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것이지, 그가 그리스도로 부터 받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신자들의 풍부한 신앙 자산에 부응하기 위해, 과거의 치교권으로 더 이상 ‘충실’할 필요가 없는, 연속성을 가질 필요가 없는 ‘진짜 치교권’을 도입하는 것은 그 자체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치교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연속선상에 있는 것을 막는 것은, 마치 연속성이 자동적인 결과인 것처럼, 해석상 연속성의 오류이며 진정성에 대해 요구되는 선 조건이 아닌 것이다.

 



• SSPX냐 FSSP이냐? 치교권에 대한 진짜와 가짜 관념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이 같은 과장, 즉 확대해석은 교황이 르페브르 대주교를 파문한 사실이 정당했다는 것에 대한 SSPX와 FSSP의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차이이다. 성비오10세회(SSPX)의 경우 르페브르 대주교는 “신앙 없이는 정당화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라는 신념으로 가톨릭 신앙을 그의 주교단과 신자들에게 “그가 전해 받았던 것을 전달” 하는 데에 있어서 옳았다는 것이다.




• 충성은 SSPX의 원리이다 

 

충성의 커다란 원리는 성비오10세회의 바로 그 원리인데, 모든 시대의 신앙에 대한 충성이요, 모든 시대의 전례에 대한 충성이며, 성인들의 신앙에 대한 충성이요, 그 성인들께서 행하신 미사에 대한 충성이며, 그 성인들의 도덕에 대한 충성과 성 교회에 대해 충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르페브르 대주교는 온 생애를 바쳐 행한 원리, “tradidi quod et accepi,(내가 너희에게 전한 바는 나로서도  또한 받은것이니)”, 바로 그것이다. 성비오10세회(SSPX)는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가는 충직한 종”(마테오 25:21~23)에게 주는 약속된 상을 받기위해 설립된 것이다.

 

지극히 충실하신 동정녀여 우리 모두가 생명의 면류관(묵시록 2:10)을 받을 수 있도록 ‘죽을 때까지 충성’ 할 수 있게끔 도와주소서!
                                     

프랑소와 레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