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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회는 혼인과 가정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나요?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8-21



질문: 교회는 혼인과 가정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나요?


답변: 혼인과 가정을 이룸은 천주성부의 선물이다. 혼인에서 두 사람은 살아있는 유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과 연결된다. 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특별한 방법으로 산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런데 왜 천주께서는 결혼한 부부를 그리스도와 교회와 가까이 일치시키셨을까? 그분의 생각은 무엇이었는가?


 간단하다. 가지는 나무의 생명으로 산다. 만일에 가지를 구부린다면, 그 행동은 나무에게 하는 것이다. 새가 나무에 앉을 때, 새는 가지위로 날아가 앉는다. 가지를 보면 나무를 보는 것이다. 가지와 나무는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천주께서 혼인이라는 위대한 성사를 주셨는지 알 수 있다. 천주께서는 모든 가족이 천상의 부부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생명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


자녀들


 우선 자녀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며 (생명의) 시작부터 그리스도와 교회가 그들을 따뜻한 사랑과 친절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주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구원하고자, 그들에게 천국에 영원한 거처를 마련해 주시고자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교회는 천주의 자녀들에 대한 같은 사랑으로 숨 쉰다. 교회는 이 자녀들이 천주의 사랑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한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이 부모들의 마음에 부어졌으니 이것이 혼인 성사의 효과다. 그들은 세례 받은 자녀들을 교회와 그리스도의 심장에 불타는 같은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해야 한다. 부모들이 그 사랑을 따르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살아계시는 사랑과 같은 사랑이라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이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자녀들에게 최고만을 주고자 하는 부모의 깊은 열망에 부합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육하고 기른다. 부모들이 식탁에 빵을 놓거나 좋은 학교를 선택하거나 옷을 고르거나 자녀들을 위로하고 권고하고 상기시키고 기쁘게 해 주거나 자녀들이 실수했을 때 용서하고 낙담하지 않게 해 주는 모든 것은 동시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이다. 그들의 자비와 사랑은 예수 성심과 교회로부터 오는 안부인사이며 메시지다.


  동시에, 자녀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커다란 사랑과 존경으로 결합되어 있는지 경험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처럼 일치를 이룬다. 아버지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모든 것을 주시듯 어머니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어머니는 교회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존재하듯 남편의 곁에 선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 결합은 자녀들에게 큰 기쁨이다. 몇몇 가정들에서는 자녀들이 안식이 없고 거의 낙담해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속적인 싸움과 논쟁 속에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언제든지 의견의 차이는 통상적인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는 차이들이 차분하게 정상적으로 논의되는 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지속되는 논쟁과 긴장은 장기적으로 자녀들에게 해를 가한다. 이 문제는 종교적 차원에서도 큰 해악이다. 자녀들은 얼마나 강하게 그리스도와 교회가 일치되어 있는지 경험해야 하지만 위와 같은 가정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메시지 – 종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불안정하게 만드는 터무니없는 메시지 – 를 받게 된다.


 부모 사이에 일종의 권력 투쟁이 있거나 누군가 꼭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 순간이나 엄마가 아버지와 아이들을 통제하려고 할 때 이 문제는 더욱 악화된다. 이 양상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천주의 자녀들을 지배하고자 한다는 왜곡된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전달하기에 이른다.


부부


 자녀들 외에, 혼인성사로부터 커다란 사랑을 끌어내도록 되어 있는 이들은 배우자들 자신이다. 그들의 결혼식 날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고 더 커졌으면 하는 바람은 가장 큰 소원이 아니었던가? 성사가 배우자의 마음에 신성한 부부를 하나로 묶는 동일한 사랑을 쏟을 때 바로 이 열망을 충만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죄는 제외하고 인성을 온전히 취하셨다. 심지어 원죄 이전에 낙원에서 아담과 에와 사이에 놀라운 부부애가 있었다. 이보다도 더 큰 사랑이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 거하는 참된 인간적이고 반려자적인 사랑이다. 아가서의 신부는 말한다.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콤하답니다.”(아가 1,1) 이 사랑이 그리스도인 배우자들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게 하고 심지어는 성장시켜준다. 그들의 마음에만 의지하게 하는 대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마음에서 끌어내게 해 준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유효하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 모든 친절한 말, 상대방에게 주는 모든 즐거움, 다른 이들에게 쏟는 모든 시간, 모든 것을 성사에서 끌어낼 수 있다. 가나(혼인)의 부부가 그곳에 갑자기 많은 양과 고품질로 생겨난 예수님의 포도주로 혼인잔치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처럼, 부부들의 깊은 소망이 여기서 충족될 것이다!


주변 환경들


 오직 가정들만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면전에서 교정되고 격려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훌륭하게 생활하는 모든 결혼은 천주께 영광이며 천주의 영원한 계획은 천주의 어린양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이다. 천국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묵시 19,6)가 될 것이다. “천국은 마치 임금이 그 세자의 혼인잔치를 거행함 같으니”(마태 22,1) 이 혼인으로, 천주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대속하시며 전능하신 섭리로 이끄신다. 모든 혼인성사의 은총에 충실한 혼인한 부부는 만일 자녀가 없을지라도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천상으로부터 오는 빛이며 천주께서 태초부터 계획하신 “크나큰 신비”(에페 5,32)를 상기시켜준다. 오늘날 우리는 천주의 이 위대한 계획을 말해주는 삶을 살면서 비관하고 의기소침가운데 살지 않는 부부들이 필요하다. 많은 젊은이들 중 혼인할 용기를 내는 이가 없다. 수많은 실패하고 불행한 혼인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포르노, 이혼, 낙태, 젠더이데올로기 그리고 동성애의 전반적 공격을 받고 있다. 악마는 천주 계획의 커다란 신비를 거슬러 맹렬히 싸운다. 바로 오늘 우리는 꽃피우는 부부들, 그들의 삶을 통하여 신적 친구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곁에 서 있는 부부들이 다시 필요하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마태 5,14)


위험에 처한 혼인


 하지만 누군가는 위 내용은 실제와 다르다고 반박할 수 있다. 더 이상 조화가 없고, 긴장이 심하고, 분열, 실망, 괴로움, 억압된 분노 또는 분쟁이 있는 다수의 꽤 그리스도교적인 결혼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이 결혼들을 더 낙담시킬 이상이 여기에는 없습니까?


 이런 경우,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용기의 상실이 수차례 누적되어 온 결과다. 반려자의 실수와 특이함을 감내하는 것은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힘들어졌다. 마침내는 한 사람이 포기한다. 이 시점에서 결혼생활에 결정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교적이고 초자연적인 길을 지속하는 대신 단순한 인간적 행동으로 변화한다. 실수에 인내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응수한다. 성격의 다양함은 늘 같은 상황에서 충돌하고 요구는 더 폭력적으로 표출된다. 갑자기 “옛 인간”이 우리를 지배한다. 이 옛 인간은 새 인간과 대비되는 것으로 불행만을 몰고 온다. 이 옛 인간이 항상 새로운 죄로 이끌지 않았던가? 맞다. 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그리고 바로 이 사람에게 우리가 실제로 중요한 것을 맡기는 것이다. 바로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랑과 관계다. 이것은 삶에 더 많은 논쟁과 짜증을 가져오고 계속 긴장을 심화시키는 드라마다. 부부는 이 본성을 바꾸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풀이 꺾였다.


혼인과 구원


 이것은 근본적으로 오래된 의문을 제기한다: 무엇이 사람을 더 나아지게 하는가? 보다 나은 교육, 지상명령(양심의 절대적 도덕률)과 도덕주의, 고도로 양식화된 인권으로 시도했으나 어떤 것도 결정적인 돌파구를 가져오지 못했다.


 만일 그리스도를 본다면, 이 문제를 그분은 어떻게 보실까? 길이 있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답이다. 사람은 규정과 계명, 훈계나 위협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다만 완전히 새로운 용서와 완전히 새로운 기회,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시작으로 발전한다. 너무나도 무거운 인간들의 죄에 정면으로 천주께서는 겸손하게, 부드럽게, 화목하고 다정하게 다가오신다. 이것이 끊임없이 용서받고 새로운 기회와 새 시작을 받는 그리스도인 생명의 기쁨이 아닌가? 만일 천주께서 우리가 하는 것처럼 아주 적게 새로운 기회를 주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 생명은 재빠르게 끝나버릴 것이다! 사람이 오직 용서와 새로운 은총으로 과거를 청산해야만 개선된다는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이 길이 유일한 길이며 만일 더 나은 길이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길을 보여주셨을 것이다.


 마지막 좋은 고해와 그것이 자유롭게 했던 것을 기억하자. 모든 것이 사해지고 잊혀진다. 새로운 기회가 일어서고 깊은 기쁨이 마음에서 움직인다. 또한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삶을 계속하고 다시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천주께서 선을 위하여 백성들을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바다. 다른 길은 실패한다. 누군가는 “실패한” 결혼을 수년 간 고해소에 가지 않은 상황과 비교할 것이다. 매사에 어둡고 안식이 없고 지겹다. 우리 인간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는 그 사랑이 필요하다. 다른 길은 없다.


 어디서부터 이 새로운 기회, 쇄신된 선의 즐거움이 오는가? 고해성사에서 온다. 고해성사로 그리스도와 교회는 사랑을 주신다. 사제는 이 사랑의 하나뿐인 도구다. 결국 모든 고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선물이며 그 사랑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 사랑은 결혼한 부부의 마음에 주어진다. 이 사랑이 고해성사와 같은 일을 하기 원하신다. 나쁜 것을 용서하고 잊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것이다. 이렇게 혼인성사는 고해성사와 같은 영으로 감도를 받는다. 잊음, 용서, 그리고 새 시작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대속하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 인간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랑이다. 용서와 자비는 특별한 경우의 예외가 아니라 매일의 양식이다. 아마 이 생각조차도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몇몇 결혼의 전환점에 놓여 있다 ...


 다시 여기에 모든 성사들이 명확해지는 기본적 특징이 있다. 성사들은 대속의 중심 요점들이다. 두 사람의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뿐 아니라 천주의 용서와 치유하시는 사랑을 되새기게 하는 견고한 매개체가 되어야한다. 혼인은 천주 성총과 자비의 가시적 표징이다. 성모께서 가나의 혼인잔치 때 하신 말씀을 잊지 말자. “저 너희게 무엇이든지 분부하시는 것을 행하라!”


Source: District of 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