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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모기사회에 보내는 서한 제12호- 슈텔린 신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3-21





성모기사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12번째 편지



지극히 겸손하신 성모님


친애하는 성모기사회  회원 여러분!
금년 성 금요일이 3월25일이기에, 천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하나 안에서 우리 신앙의 두 가지 커다란 신비를 묵상하면서 자신을 어떻게 성화(聖化)시킬지에 대해 가르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 육신의 신비를 일치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겸손!
두 신비 안에서 우리는 겸손의 최정점에서 도움을 줍니다. 3월25일(영보첨례)에 천주 사람이 되사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고, 말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셨고, 하늘과 지상의 여왕이신 천주의 모친은 오직 주님의 지극히 겸손한 종으로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성 금요일 성자와 모친은 ‘벌레이자 인간이 아닌’, 인간이 거부하는 나병환자요, 사악한 존재로서 취급되는, 가징 치욕적인 가운데 소멸되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성모님의 겸손 안에서 성모님을 따르고 모방하는 것입니다. 왜 성모님이 모든 성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신 분이 되셨나요? 성모님의 겸손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겸손을 통하여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근본적으로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천주님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에서 자신을 비웠습니다. 성모님의 영혼은 가난하고 ‘소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완전히 비운 상태였습니다. 이는 귀중한 금으로 된 성작과 같습니다. 귀중한 액체를 가득 담기 위해서 성작은 비워져야 되고, 먼지의 지극히 작은 한 점도 없어야 합니다. 귀중한 액체는 반드시 다른 것과 섞임 없이 순수한 상태로 보존 되어야만 합니다.


 마리아의 생애는 겸손의 행위로 계속된 줄기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가장 겸손한 영혼의 부동(不動)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먼저 주목해야할 것은 성모님의 겸손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겸손과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겸손은 특히 원죄로 인한, 그리고 많은 개인적 죄로 인하여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보게 됩니다. 자기들의 영혼이 황폐화된 궁전이라는 부끄러운 모습은 인간의 겸손이 나오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성모님의 겸손은 죄를 자각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마리아는 결코 어떠한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겸손은 사랑의 겸손이며, 천주님의 친교를 받아드리는, 이러한 친교는 완전히 사욕도 없고, 순수한 선물이며 전적으로 공로가 없는 은총인 친구의 겸손입니다. 사랑받는 정배는 자신에게 부여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의 위대함을 알면서 완전한 헌신과 자기부정을 하면서 대답합니다.


 이 유일한 겸손의 영혼은 천주님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너무 기뻐하고, 천주님의 장엄함에 푹 빠지고, 천주님의 완벽함에 완전히 녹아들어 모든 성인들이 원하는 것은 천주께서 성모님께 그냥 기꺼이 주시는 모든 것에 대해 천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천주님이 누구이시고, 천주님이 주신 것을 마리아의 깨달음이 위대할수록, 성모님의 겸손도 더 위대해집니다. 그리고 성모님이 마니피캇 찬미가에서 노래를 합니다: “내게 크게 베푸신 자는 크게 전능하시고, 그 이름이 또한 거룩하시도다.”


 그래서 마리아 생애에서 일어난 것은 우리 생활에서 일어난 것과는 반대입니다. 우리가 덕행과 재능을 발견할수록, 우리가 그것들을 발전시킬수록, 우리가 위험을 초래하는 것을 우리 탓으로 돌릴수록 우리 안에서 더 기쁨을 누립니다. 청중 앞에서 자랑하기 위해,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관심을 더 받기 위해, 칭찬받기 위해 하는 것들은 우리 삶을 채우는 교만의 모든 고전적인 사례들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영혼 안에서 보물을 깨달았지만, 성모님은 그곳에 그러한 보물을 놓으신 분이 누구라는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재능, 강점 그리고 덕행을 오로지 우리 것으로만 돌립니다. 선물을 부여하신 천주님은 우리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지혜로운 말씀을 잃고서 삽니다:“겸손이란 천주님의 선물을 냉담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배우는 데에 있다.”


 마리아 생애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또한 겸손의 다른 특성과 표현을 배웁니다. 이 점에서 특히 우리는 마리아의 비밀에 대해 모든 묵상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질문에, 즉 우리가 이러한 심오한 진리를 가지고 사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모님을 모방할 수 있는가? 생애에 있어서 가장 훌륭하고 죄에 떨어지지 않는 모범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분은 누구인가? 에 답변해보는 것은 가치 있는 것입니다.


 먼저(성모님의 무염시잉태와 탄생 이후)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어린 아이로서의 마리아를 봅니다. 많은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기록하기를 성모님은 학문의 주입 받았고 성모님의 존재 바로 그 순간부터 마리아는 보편적 지식에 관한 특별한 특권을 천주로부터 부여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완벽하게 모든 성서뿐만 아니라 그 깊은 의미까지 아셨습니다.


 그랬어도 오랫동안 성모님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지식을 숨겼을 뿐만 아니라, 교회당국으로부터 끈기 있게 배우기를 승복하였습니다. 성전의 사제가 유대철학에 관한 교훈을 주었을 때, 끈기 있게 경청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자는 지키지만 정신을 죽인다고 책망하셨던 율법학자의 가르침에 경청하셨습니다.


 여기 한 사례가 있습니다:“몇 시에 아침기도를 시작해야 하나요? 새벽에? 검푸른 밤에 대비되어 빛이 발하기 시작할 때? 그러나 푸르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산이 푸르고 하늘이 푸르지 않나요? 그 외에 무엇으로 봅니까? 절제로? 꿰뚫어서? 학생은 모든 해석을 알아야했고 한 율법학자가 이런 방식으로 저런 방식으로 또 다른 방식으로 가르친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 단지 지루하고 비판적이 되는 것에 대해 바람직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래도 마리아는 교회 당국에 순명하는 자세를 취했고 이러한 겸손한 자세는 온순함과 승복(承服)이었습니다. 분명히 그 당시에 마리아는 몇 가지 훌륭하고 빼어난 몇 가지를 배웠는데, 그것을 훨씬 더 훌륭한 사랑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그와 반대로 나타납니다. 일단 우리는 몇 가지 신학 지식을 얻으면, 그러면 그것을 듣자마자 사람들에 의해 반복되어서 지루함을 빨리 보여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아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가 그걸 무시하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길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런 상황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 왜냐하면 설령 지식의 10% 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새롭거나 또는 우리에게 알려진 그 주제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면, 우리가 천주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천주님의 신비는 무한하고, 또한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한 행동에 대해서는 천주께서 수년간 열심히 공부해서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을 천주께 봉헌한 것은 정결의 서원을 하면서 천주님의 영감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이는 동정 마리아 자헌 축일처럼 전레력(典禮曆)에 나오는 특징입니다.


 교회당국은 아이가 없는 각각의 여인이란 천주에 의해 저주받은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동정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학자들은 여인에게 있어서 기품 있고 동정을 지키는 생애는 알지 못했고 오직 결혼한 여인의 생애만을 알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부모들이 자녀의 혼인을 결정하였고 소녀들을 성전에서 일을 하게끔 보냈습니다, 교회 당국의 부모로서의 책임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소녀들은 누구와 결혼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마리아를 위한 남편을 단지 선택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집안에서 나온 요셉을 마리아와 함께 선택했습니다.


 마리아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마리아가 반발하지 않은 것은 그 얼마나 많은 겸손이 요구되는가, 동정녀로 남으려는 마리아의 의도에 대해 어떻게 요셉이 반응하는가에 대한 두려움에 인해 마리아가 이겨내려는 데에 얼마나 많은 인내와 신뢰가 필요한 가를 아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녀들은 대개 마음으로 반발심을 일으켰고 천주께 불평했으며 투덜거렸습니다.


 마리아는 겸손한 신뢰상태에 있었습니다. 겸손의 위대한 표현은 천주님의 섭리를 맹목적으로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때, 모든 것이 실패요, 재앙이라 생각될 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될 때, 우리의 결과에 탈진되었을 때, 절망만을 기억할 때, 혼란도, 걱정도 심지어 호기심도 없이 우리는 모든 것을 천주께 맡겨야 하고 꾸준히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의 정점입니다. 겸손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알며 무가치함을 아는 사람은 천주님의 뜻을 행하려하고 그러면서 항상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을 주시는 천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기다립니다. 


 겸손의 가장 중요한 순간과 가장 위대한 표현은 영보고지(領報告知)입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겸손이었고 겸손만이 남았습니다. 대천신 가브리엘(그 뜻은 ‘천주님의 힘’)은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소녀 앞에서 깊이 인사하였습니다. 그리고서 마리아의 겸손이 있었고, 마침내 겸손의 정점이 있었습니다. - 인간의 몸(본질)안에서의 천주님의 성 육신이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마리아 내부에서는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나요? 마리아가 천주님의 본질, 그분의 위엄, 그분의 무한성을 깊이 무상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주님이 모든 사물의 절대적인 진리임을 현양하였습니다. 천신이 마리아 앞에 섰을 때, 마리아는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천신의 하례를 들었을 때도 이와 비슷하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gratia plena, Dominus tecum, benedicta inter mulieres!”(주께서 너와 한가지로 계시니 여인 중에 너 총복을 받으시며)가 무슨 뜻인지를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들은 자는 그의 말씀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놀라운 영예 뒤에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왜 자기가, 모든 이 중에 가장 비천한 자가 그와 같은 선물을 받아야했는지를 이해 못했습니다. 천신은 말했고 마리아가 가장 위대한 영예, 천주님이 피조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임이 분명해졌습니다.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이 되었고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의 본질적인 생명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대한 성모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나요? 성모님이 발언하신 첫마디는:“저는 남자를 모르는 데 이일이 어찌 가능하겠나요?” 이것이 성모님의 유일한 관심사-천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천주님의 뜻을 이행하는 것은 거룩한 동정 안에서 천주님께 헌신/봉헌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천주님은 엄숙하게 마리아의 정배로서 성 요셉을 주심으로써 성모님의 동정성을 확인 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동정 서원을 존중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자신도 동정을 지키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정 선물로 인해 마리아는 천주께 온전히 자신을 바칠 수 있었고 천주님의 자비에 무한히 자신을 열었습니다.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자연적인 질서 안에서 이러한 두 가지 현실, 동시에 동정과 모성을 갖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마리아는 설명해달라고 천신께 요청하였습니다. 천신은 700년 전 이사야 예언“보라 동정녀가 아이를 가질 것이다”에 의한 예고된 위대한 기적을 설명하였습니다. 천주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결론에 직면하여 마리아는 동의를 하였습니다.


 심지어 매우 경건하고 성인 같은 사람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천주께서 그저 마리아를 택한 것에 대해 거의 만족하질 않습니다. 이렇게 쉽게 생각 합니다:“그런 영광을 받다니, 그 얼마나 훌륭한가, 내가 지금 타인에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내가 그런 영광을 받다니 천주 그 얼마나 친절하신고.” 그 순간에서 아주 적은 기쁨을 받아드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비록 마리아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으로서는 가장 위대한 방법으로 복되고 영광받도록 택함을 받았어도 마리아는 이 모든 것이 천주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알았습니다. 천주님의 자비에 의해 행해진, 마리아의 위대한 사명에도 불구하고 천주님의 몸종의 겸손을 고려하신 지극히 높으신 분은 마리아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창조에 대한 천주님의 행위에 의해 공허함에서 마리아는 나왔습니다. 마리아가 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마리아 안에서 아름다웠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우리가 아는 것은 전부 천주님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천주님의 위엄이 무한하심과 마리아의 무가치함이 무한함 이 두 가지 무한성을 생각하면서 마리아는 논리적인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주님은 전부요,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제 안에서 모든 것입니다. 당신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주님의 종을 보소서.” 이러한 총체적인 신심이 그 보답으로 잃어버린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 천주님의 본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천주사랑의 바다를 움직였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루에 세 번씩 삼종기도에서 이러한 신비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숫자 3은 완전, 전체, 불변, 지속을 상징합니다. 세 번의 기도는 그날 하루 동안 우리가 계속하여 마리아의 겸손을 우리가 모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영보고지의 중요성과 겸손이라는 덕행의 중요성을 손상시키지 아니합니다. 이 사건에서 겸손은 천주께 대해, 천주님을 향한 자기 자신을 전체적으로 부정하고 온전한 신심으로서 가장 깊은 본질 안에서 드러납니다. 마리아의 대답은 어떠한가요? Ecce ancilla Domini.(주의 종이 여기 대령하오니) 개인적인 말은 여기서 빠져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가장 정중한 말만을 볼 수 있으니, 즉, 종, 몸종, 노예입니다! 마리아는 항상 가장 겸손하였고 자기는 천주님 앞에서는 무가치한 것을 여겼습니다.


 영보고지에서 마리아의 겸손은 가장 혹독한 시험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지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하고, 게다가 존엄적인 측면에서 천국에 있는 모든 천신들보다 무한히 우월하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최고이자 가장 위대하시고, 가장 강력하신 분이신 천주께서 친히 천국과 지상의 여왕을 구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이러한 메시지를 받자마자 어리둥절하고 혼미해집니다. 반면에 참으로 대단한 영광을 받았음에도 마리아는 그분 안에서, 마리아 안에서 홀로 지극히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천주님을 조용한 가운데 경배하면서 평화로워집니다.


 마리아의 겸손은 영보고지 이후 즉각적으로 분명해집니다. 마리아는 집안 일, 소소한 일을 하러, 그리하여 사촌을 돕고자 즈카리아와 엘리사벳의 집으로 서둘러 갑니다.


 마리아는 겸손하고 심지어 부끄러운 동료들을 찾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 마리아는 좋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즈카리아와 엘리사벳은 이러한 소수의 겸손한 사람들에게 속했는데, 이들은 법률 안에서 의를 찾고자하는 교만한 바리세이들과는 반대되는 사람들로서, 주님의 약속 안에서 믿음과 신뢰를 통해 자비로우신 천주님으로부터 도우심과 구원을 기다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치를 당했습니다. 아이가 없는 결혼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들이 천주님으로부터 벌도 받고 심지어 저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즈카리아는 벙어리였고 이것이 저주의 분명한 증거라고 마을 사람들은 믿었으며, 그는 천주님의 사역을 벙어리로 끝냈습니다. 마리아는 그의 숨겨진 죄에 대한 천주님의 벌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멸시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아니하였고, 글로도 몸짓 언어로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겸손의 위대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천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처럼 겸손한 자들도 그러합니다. 그러고 이 세상에서는 겸손은 항상 수치를 수반하고, 겸손한 사람은 수치를 당한 사람에게 끌리며, 특히 체념한 채 천주님의 손 안에서 수치를 당한 이들에게 끌립니다. 이 문맥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즈카리아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동안 마리아는 마음을 열어 마리아의 마니피캇 찬가를 불렀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겸손의 또 다른 측면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것, 즉 천주 자비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너무나 많이 채워 주시길 원하시는 천주성심의 위대함에 대해 기억하는 것입니다. 천주님은 오직 겸손한 영혼에게만 이를 원하십니다. 마니피캇의 노래는 오로지 지속적으로 전능하신 유일하신 분을 찬미하는 새로운 방법을 추구하는 겸손한 영혼의 상태를 전해주는 여러 가지 결합된 기도입니다.


 겸손의 또 다른 측면은 고통입니다. 겸손(천주님을 향한 영혼의 상태)의 바로 그 행위는 흔히 다른 피조물에 관해 고통으로 귀결됩니다. 겸손한 영혼은 천주님의 위대한 성심 앞에서 자기를 열고 천주님은 성모님에게 천주님의 무한하신 신비 안에서 한 몫을 주십니다. 그리고 천주님의 신비가 무한하기에, 그 영혼은 성모님 안에서 무엇이 진행되는지를 타인에게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심지어 성모님의 가장 절친한 친구조차도 성모님을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고통을 겪고 영혼 또한 고통을 겪습니다. 오해와 심지어 거부당함을 느끼고 물러납니다. 그리고서 오랜 친교와 친근함이 점차 사라지고 죽고 맙니다.


 이런 점에서 요셉 성인의 고통은 성인께서 마리아가 아이를 임신하여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을 때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가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의 주변 환경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물러나고 사라지는 것 외엔 다른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꺼이 사라지려하는 것은 그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임을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이와 같은 준비 자세는 성 요셉을 압도하였던 천주님의 위엄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방법과 강도를 보고 일어난 겸손의 행위였습니다


 천주님은 항상 겸손의 행동에 보상을 하십니다. 필요하다면 기적을 통해서라도 하십니다! 그리고 겸손한 영혼은 기쁨 안에서 뿐만 아니라, 고통 안에서도 천주께 신뢰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겸손은 실제적으로 항상 치욕과 연결되어있습니다. 타락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있어서, 치욕 없이 겸손의 덕행을 얻기는 불가능합니다. 성모님이 원죄로부터 완전히 보호 받았기에 성모님이 다른 상황이라 하더라도, 성모님은 자발적으로 치욕을 받아드렸고, 이러한 점에서 역시 겸손의 모범이 되기 위하여 우리보다는 더 무한히 위대하고 훨씬 많은 겸손을 지녔습니다. 오로지 검증된 겸손만이 참입니다. 그 순간부터 “당신들에게 줄 방이 없어요.”라는 말은 베들레헴에서 나왔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받는 치욕에 참여하였습니다. 주님은 몸으로 받는 치욕들을 감당하셨고, 반면에 성모님은 심정으로 치욕을 감내하셨습니다. 썰렁한 동굴에서 천주성자를 낳는 치욕, 도망자 신세의 치욕, 이집트로 피신할 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치욕, 나사렛에서의 가난의 치욕(증언은 로레탄 집!)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전교활동기간의 수많은 치욕, 그 당시에 성모님은 아들을 향한 악한 이들의 점차 타오르는 적개심을 친히 체험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총체적인 신체적 소멸로 나아갈 때 수치의 정점을 이끌었습니다. 그 순간 영적으로 소멸된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장 혹독한 시험이 놓였을 때, 성모님은 겸손을 보이시고, 물러나지도, 동요되지도, 서두르지도, 불평이나 반역도 저지르지 않습니다!


 오직 성자만을 위해 사신 마리아는 주님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서 받아드렸습니다! 가장 거룩한 분 대신에 성모님은 죄인들을 받아드렸고, 천주사랑 대신에 성모님은 우리의 냉담함과 무관심을 받아드렸고, 아름다움 대신에 우리의 기형(奇形)을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온 마음을 다하여 천주님의 뜻을 받아드렸습니다! 겸손의 정점을 보십시오!


 이러한 사례(思慮)가 우리를 돕도록, 특히 이 거룩한 사순절 기간에 겸손한 성모님의 칠고 안으로 들어가도록, 그리하여 성모님께 요청하사 우리도 역시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찔리신 주님의 성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은 풍성하게 채워지고 성화시켜 우리를 변하게 할 것입니다!  


  General Santos, 14 February 2016  Fr. Karl Stehlin



 2017  파티마를 향하여
 이 글은 매우 길며 여러분들은 1917년 5월 13일 사건에 관한 글을 3월 초에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