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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우리의 이상(理想)- 성모님의 신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11-06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우리의 이상(理想)


제3부 성모 마리아: 성모기사회의 틀이자 모범


제1장 성모님의 신비


누구든 그가 천주모친의 경이로운 세상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그 시점에서 일상적인 인간의 생각이나 말에서 떠나야 하고 특히 새로운 영적인 세계로 모험해야하니, 영적인 세상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룩하고, 순수하며, 투명하며 그리고 섬세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흔히 더러움이 묻어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너무나 가깝게 육신에 대한 원초적인 형태 및 세속적 감각으로 넘쳐나기 때문에, 가장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은총의 옥좌’로 다가가야 한다.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미사 초입경) 우리는 영(靈)의 가장 미묘함에 깨어 있어야 하고, 천주님의 세상을 살짝 보는 것이 허락되는 이 합당하지 못한 기적에 놀라야 한다.

 

 성모님에 대한 글을 읽을 준비가 될 때,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여러분이 어느 오점도 없는 순수한 살아있는 존재와 접촉하는 곳으로 들어감을 알아야 한다. 역시 생각해야 할 것은 여러분이 읽은 그 말은 그분이 누구인지 표현할 능력이 없다 함이며, 왜냐하면 그 말은 인간의 관념에서 끌어온 것이니, 이 인간의 관념이란 오직 세속적인 방법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기에, 성모님이 누구이신지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와 반면에 성모님은 천주께 온전히 속한 분이시기에, 그러므로 여러분 주위의 모든 것보다는 무한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성모님은 친히 당신 자신을 여러분의 수준에서 읽고, 생각하고, 확신하고 느끼는 감각을 통해 드러내실 것이다. 이는 여러분 자신의 감각으로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심하시오: 여러분의 양심을 보다 분명히 하는 것,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더욱 깨끗이 하면 할수록, 성모님에 대한 여러분의 관념과 인식은 그 현실에 호응할 것이라는 점을.

 

 역시 정직하게 인정하자. 성모님 없이 여러분 혼자서는 성모님에 대해 도무지 알 수 없거니와 결과적으로 여러분이 성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고, 게다가 성모님이 여러분을 더더욱 비추어주셔야만 하는데 이는 여러분의 마음을 성모님 사랑 안으로 끌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의 영적 독서가 열매를 맺으려면 성모님에 대한 기도에 달려있는 것이다.(Fragment of an unfinished book about the Immaculata, January 1940, BMK, p. 592.)

 

 사람들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천주의 모친에 대해 말하는 데 있어서 항상 같은 표현을 한다는 점,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같은 표현을 하고 있음에 놀랄 것이다. 신부님은 짧고 간단하게 ‘성모님’(the Immaculata!)이라고 성모님을 부른다. 성모무염시태는 사실 신부님의 모든 영적 생활의 중심이다! 신부님은 반복해서 성모님에 대해 말하고 글을 쓴다. 그분의 온전한 사명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을 알고, 성모님을 사랑하여, 성모님께 신심을 바치고 그리하여 구령을 얻는 것으로 총합되어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영웅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신부님이 체포되기 전 마지막 시간에, 신부님은 천주의 영감으로 성모무염시태에 대한 관념을 요약하였다. 어느 성인의 글이나 말이 이와 같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관상의 심오성에 도달한 것은 없다. 이러한 말씀은 성모님께서 친히 입으로 전한 말씀이다. 그래서 그 말씀은 성모님이 참으로 누구이신지 가장 자세하고 핵심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언어는 천주님의 현실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불가능하기에, “하자 없는 (티 없는)” 그리고 “무염시태“와 같은 단어들의 의미는 훨씬 깊은 의미가 있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며, 일반적인 것보다 더 아름답고 숭고함이 따른다. 지극히 꿰뚫고 있는 상태에서의 인간 이성이 이러한 의미를 줄 수 있는... 그것을 초월하는 의미이다.

 

 바오로 성인이 인용하는 이사야 64:4의 말씀은 여기서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마음으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천주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예비하셨느니라.”(코린토 전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모님의 신비에 관해 묵상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명철과 언어가 그러할 능력이 될 정도까지 이에 관하여 읽고 말하고 써야한다.

 

 그대, 무염시태이신 당신은 누구신가?

 천주님이 아니시니, 왜냐하면 천주께서는 잉태(시작)가 없기 때문이다. 천시도 아니니 천신은 무로부터 직접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요, 아담도 아니니, 아담은 흙의 먼지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성육화 되신 말씀도 아니니, 그분은 모든 천신들에 앞서 존재하신 분이기 때문이며, ‘잉태’라기 보다는 ‘잉태되신’ 단어를 사용해야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와(이브)의 자녀들은 잉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 자녀들을 (창조된) 잉태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오, 마리아여, 그대는 에와의 모든 다른 자녀들과 다르니, 왜냐하면 저들은 원죄로 말미암아 죄로 물든 잉태된 자들이나, 반면에 당신은 홀로 무염시태(無染始胎)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천주님 밖에서 있고 이 자체 내에서 사물의 창조주에 약간의 유사성을 가지게 되니, 왜냐하면 사물은 천주로부터 전적으로 온전히 온 것이며, 모든 방면에서 천주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에는 이와 같은 유사성을 모두가 가지고 있으니, 왜냐하면 모든 것은 첫째 사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조된 사물에 대해 말하는 데에 쓰이는 말들은 천주님의 완벽함을 표현할 순 있지만, 오직 불완전한 방법으로, 유사하게 그리고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다양한 창조된 현실의 구체성뿐만 아니라 천주님의 특성에 대한 다소간의 메아리에 불과하다. 이 규칙에 대한 예외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방금 말한 것은 ‘잉태’에 대한 단어에도 해당된다. 


 성부는 아들을 낳으시고, 성신은 성부와 성자에 앞서 운행하시니라: 이 몇 가지 말씀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의 생명과 모든 피조물 안에서의 완벽성의 신비를 요약한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단지 중첩된 메아리, 찬미가라는 노래, 많은 색조가 있는 묘사, 태고(太古)의 신비, 모든 신비의 경이로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조의 사전으로부터 취한 단어들을 사용하자, 왜냐하면 우리에게 s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저 단어들도 매우 불완전한 말이라는 것이다. 성부는 누구이신가? 천주님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는 낳음에, 영원히 존재한다. 성부는 시작부터 성자를 낳으시고 영원하시다.

 

 성자는 누구이신가? 영원히 태어나신 분, 영원으로부터 성자는 성부에 의해 낳음을 받으신 분이다. 


성신은 누구이신가? 성부, 성자의 사랑의 꽃이다. 창조된 사랑의 열매는 (새로운 존재의) 창조된 잉태다. 그러나 창조된 사랑의 원형은 순수한 잉태이다. 그러므로 성신은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잉태’, 우주를 걸친 새 생명의 모든 잉태의 원형이다.

 

그러므로 성부 낳으시고, 성자 태어나시니, 성신은 ‘잉태’ (저들의 사랑으로 연유한)이다. 이는 서로간의 위격을 구별하지만, 반면에 같은 본질은 저들을 일치시키고, 즉, 저들이 지닌 천주성의 본질을 일치시킨다. 성신은, 그러면, 지극히 거룩하시고, 무한히 거룩하시고, 더럽혀지지 않고, 무염시태이다.

 

우주 모든 곳에서 우리는 작용과 반작용을 보게 된다. 반작용은 작용과 동등하나 반대다. 출발과 귀환이다. 떠나고 돌아오는 것이다. 분열과 재 일치이다. 이것이 모든 피조물 안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의 모습일 뿐이다. 일치는 사랑, 창의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성 삼위 자체 밖에서 천주의 활동은 같은 패턴을 따른다. 첫째, 천주님은 우주를 창조하신다. 이것은 ‘분리’와 같은 것이다. 천주께서 주신 자연의 법칙에 따라 피조물들은 저들의 완벽함에 도달하고 천주님과 같게 된다. 지적인 피조물들은 의식적으로 천주님을 사랑하고 이 사랑 안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점점 더 천주님과 같이 일치시키고 그리고서는 ‘천주님에게로 돌아온다’. 천주님에 대한 이러한 사랑으로 완전히 가득 찬 피조물은 마리아이니, 죄로부터 조금도 티 없으신 분이며, 천주님의 뜻으로부터 전혀 분리되지 않은 분이시다.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성모님은 자신의 정배로서 성신과 일치되니, 다른 어느 피조물에서 예측될 수 없는 것 그 이상의,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한 방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배’이시다.


이 일치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이는 무엇보다도 성신의 본질과 성모님의 본질과의 내적 일치이다. 성신께서 성모님 안에 거하시고, 그녀 안에 살아계시며, 성모님 존재의 그 순간부터 항상 그리고 영원히 계신다.


 마리아 안에 거하시는 성신의 이 생명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성신 친히 마리아 안에서 창조되지 않은 사랑이다. 성부의 시랑이요, 성자의 사랑이며, 천주께서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며,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 바로 그 사랑이다. 그분은 ‘잉태’라는 결실의 사랑이다. 모든  천주님의 이미지 안에 만들어진 피조물 가운데 (혼인) 사랑에 의해 가져온 일치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친숙한 일치이다. 성서는 이르기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 안에서 둘이 된다하였고, 주님이신 예수 강조하시되, “그러므로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마테오19:6) 비할 데 없는 친숙함 안에서, 보다 내적이고, 더 핵심적 방법으로, 성신께서는 마리아 안에서 사신다. 아주 깊은 그 곳 안에서 마리아를 결실 맺게 하고, 마리아가 잉태하는 그 순간부터, 마리아의 온 생애를 통하여 그리고 영원히 사신다. 이것이 영원한 ‘마리아 무염시태’, (이는 성신이시고) 마리아 영혼의 태중 또는 깊은 곳이다. 마리아의 무염시태는 티 없는 방법으로 천주님의 생명을 잉태하신다. 그리고 마리아 몸에서의 동정인 태중은 그분(성신)만을 위해 에비되면 성신으로 말미암아 마리아는 제 때에(모든 물질이 제 때에 일어나는 것처럼) 천주이자 사람이신 천주성과 인성을 임신하신다.


 천주께로의 귀환, 다시 말해서, 동등함과 반대반응은 창조행위에서 발견되는 그 길을 따르고 다른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창조의 길은 성자와 성신을 통하여 성부로부터 나오지만 여기 성신을 통한 강생은 성자께서 마리아의 배속에서 육신을 위하시고 성신을 통하여 성부께 돌아감을 사랑한다. 

 

그리고 지극히 복되신 성 삼위 사랑 안에서 어우러진 하자 없으신 마리아는 성모님이 존재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 후부터 영원히 ‘성 삼위의 완성체’가 된다.


성신과 마리아와의 일치 안에서 이는 둘을 일치시키는 두 존재의 유일한 사랑은 아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신의) 그 하나의 사랑은 복되신 성 삼위의 모든 사랑이다. 반면에 (마리아의)또 다른 사랑은 창조라는 모든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일치 안에서 천국과 지상이 합쳐진다. 천국의 모든 것과 지상의 모든 것, 영원한 사랑의 총체와 창조된 사랑의 총합, 그리고 그것이 사랑의 정점이다.


루르드에서, 마리아는 더 이상 자신을 ‘티 없이 잉태된 여인’라 부르지 않았고 오히려 성 벨라뎃타가 이야기 했듯이, “그 여인은 야생 장미덩굴 위에 서있었는데 기적의 메달에서 보여준 똑같은 모습을 했어요. 제가 세 번째 질문할 때, 성모님의 얼굴모습은 깊은 인간미가 담긴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어요. 마치 기도하듯이 손을 합장했어요. 가슴 위로 살짝 손을 모아 올리고 천국을 향했으며 천천히 손을 여시고 나를 향해 굽어보시고는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셨어요. ‘나는 무염시태(無染始胎)란다.’ ‘Que soy er’ Immaculada Councepciou’” 

 

 만약 (인간) 피조물 가운데 아내가 남편에게 속하기 때문에 남편의 이름을 택한다면 아내 자신은 남편과 일치되는 것이고, 그와 동등하게 되며, 일치 안에서 남편과 같이 있게 되고 새 생명이 창조된 것을 통하여 도구가 되며, 성신의 이름이라면 이것이 그 얼마나 많이 마리아에게 해당될까? 무염시태는 성신이 모든 초자연적인 질서를 위해 결실이 되는 그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여인의 이름이다. (1941년 2월 17일 아침에 콜베 신부님은 이 글을 적어 아놀드 수사(Brother Arnold)에게 전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50분에 신부님은 게슈타포에 체포되었고, 바르샤바의 Pawiak 감옥에 끌려갔다. 거기서 5월 28일 아우슈비츠의 수용소 캠프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8월 14일 독극물 주사로 인해 굶주림 감옥에서 죽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의 생명 안으로 지극히 친밀하게 끌어올려져있고 그리스도 구속 사업에 관여하신 성모님은 모든 조물이 천주께로 귀환하는 시작이 되고 있다. 그리고 분명히 이것은 영적생명의 진정한 기본이다. 이 기본을 갖지 않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니 바람과 폭풍우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마테오7:24) 이냐시오 성인은 그분의 영성훈련에서 이 원리와 기본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것은 천주께 의존하는 근본적인 태도로 구성된다. 인간은 천주에 의해 조성되고 오직 천주 안에서만 존재하며 그 목적을 찾고 천주께로 귀환하는 데에서 자신의 생명의 의미를 찾는다. 이것이 성모무염시태의 분명한 주제이다. 성모님의 천주님에 의해 전적으로 속하고 모든 조물 가운데 성모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와 너무나 친밀하게 일치하여 사시고 성모님이 존재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티 없으신 상태로 계신다. 또한 으뜸이자 지극히 완벽한 피조물이며 사랑이 지극히 큰 가운데 완전히 천주께로 돌아가신다. 더욱이, 천주께 돌아가는 모든 피조물에 있어서 모범이자 통로이다. 성모님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천주께로 돌아간다.

 

 이 위대한 신비에 빛을 비추어보도록하자. 교부들은 자주 자주 높은 산, 시온산, 천주님이 내려오신 산으로 비유한다. 천주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천신들의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우부를 창조하셨다. 조약돌로 싸놓은 모든 피조물을 비유하자. 천주님은 또한 정결 안에서 마리아를 창조하시고, 그녀를 모든 여성 위에 선택하여 천주의 모친이 되게 하셨다. 성모님은 조약돌이 바닥에 있는 산이다. 천주님은 이 산을 만들어 완벽히 순수하고 깨끗하며, 이 산 꼭대기로 내려 오사, 이 산의 태내에서 천주 사람이 되셨다. 그러나 산 아래에는 수많은 죄인들로 구성된 잃어버린 세상, 모래와 흙이 뒤섞힌 곳이다. 천주성자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나, 우리의 얼굴은 그분을 돌렸다. 우리의 직무태만 가운데 천주께서는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시며, 그분의 성혈로 우리를 깨끗이 하려하시지만, 우리 문은 닫혔다. 이 상황을 놓고 보면, 피조물이 어떻게 천주께 돌아갈 수 있는가 그리하여 참된 기반 위에서 자기의 생명을 세울 수 있는가? 우리 비참한 영혼인 우리를 굽어보는 거룩한 산을 보라. 그리고 타락한 자식을 들어 올려 우리를 어머니의 품으로 오게 하는 어머니를 보라.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렸던 우리 얼굴로 따사롭게 돌리시어 우리의 눈길이 주님에게 향하도록, 주님의 눈이 우리를 보게 하신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성모님은 쓰레기를 옆으로 치워 우리가 닫은 문을 열어 영혼에 열어놓는다. 성모님에게 이것이 허용되니, 왜냐하면 천주께서 이를 원하시며 또한 그러한 방법으로 성모님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 무염시태는 오염된 공기에 의해 질식사된 이후 인간이 다시 호흡하는 분위기 이다. 천주성자께서는 일하러 갈 실 수 있고, 우리는 (항상 성모님 안에서 배타적으로 허용될 뿐이다) 진리릐 기반 위에서 우리의 생명을 재건하게 된다. 진리 안에서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하는 아이처럼, 커다란 산과 함께 하는 조약돌처럼, 천주님에 속하고 천주님 안에서 천주님을 위해 성모님과 일치된다. 

 

이 기적이 그리스도인 생활이 시작될 적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는 항상 우리의 “티 없음”의 시작이다.


 루르드에서 성모님은 벨라뎃타 성녀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하자 없는 잉태이다.” 이 말씀으로 성모님은 분명히 티 없이 잉태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무염시태하신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얀 것은 그 자체 흰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 완벽한 것은 그 자체 완벽과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다. 천주께서 친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하셨으니, 시작이 없이 나는 항상 나 자신 안에서 나 자신에 속한 나 존재라는 나의 본질에 속한 것이다. 대조적으로 동정녀 마리아는 천주 안에서 성모님의 시작을 갖는다. 성모님은 피조물이자 잉태다. 그러해도 성모님은 하자 없는 잉태이다. (“Miles Immaculatæ” 1 (1938), pp. 8-9.)


 다시 말해서 천주 모친은 자체가 티 없으시고,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에게 ‘티 없으심‘을 주신다. 성모님은 우리의 존재에 스며들고, 우리가 성모님에게 속하는 정도까지 우리를 변화시키며, 그리하여 우리가 점점 성모님을 닮게 한다. 이 점에 관련하여 성 루이 마리 드 몽포르는 사과의 모습을 사용한다: 만약 왕과 친해지고 싶고 왕의 호감을 사려하는 가난한 농부라면, 여왕이 왕에게 사과를 건네주도록 여왕에게 가서 사과를 건넨다. -사과는 그의 유일한 재산이다-  본래 사과란 왕에게 드릴 선물로는 가치가 없다. 그러나 직접 여왕에 의해 건네진 사과는 황금으로 된 접시 위에 있게 된다. 이는 왕에게 어울린다. (성 루이 마리 드 몽포르 참된 신심…, paragraph 147.)

 

 이 비교를 더 많이 받아드릴 수 있고, 그 농부가 선물로서 썩은 사과를 가져온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성모님은 지금 이 사과를 성모님의 찬란한 과일과 함께 접시에 나란히 놓고 있다. 성모님이 무염시태라는 은총을 가지고 있기에, 성모님은 썩은 사과에 썩지 않음을 주시고, 성모님과 접촉을 통하여, 성모님에 의해 변화된 그 사과는 신선하고 깨끗하며 건강해진다.

 

 궁극적으로 사랑에서 나오는 우리의 가엾은 행동 모두는 최종 목적으로서 영원하신 성부께로 가지만, 성모님 안에서 하자 없는 순수함을 받고, 성자 안에서 무한하신 덕행을 받으며, 성부의 지극히 존엄성을 받을 가치가 되는 것이다! 영혼이 이 점을 생각할 적에 예수와 마리아를 위한 사랑으로 얼마나 기꺼이 점화될 것인가? 그러면 영혼은 성모님께 대한 사랑의 행동을 명하게 되고, 한 평범한 중간자에게 어는 물건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모님의 재산으로서 성모님의 무조건적인 소유물로서 넘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모님은 성모님의 소유로서 예수께 이러한 행동을 넘기는 것이고, 하자 없는 무결점으로, 넘기는 것이고, 성자께서는 그것을 성보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점점 더 성모님과 일치 되면, 마치 성모님이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된 것같이, 그리고 예수께서 성부와 완전히 일치된 것처럼 일치되는 것이다. (성모님에 대한 미완성의 글 일부, January 1940, BMK, p. 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