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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비오10세회 총장 회담, 쿠리아 드 로마 제17차 신학대회,파리, (2024. 1. 13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 : 세상에 귀를 기울이는 시노드 교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3-03






성비오10세회 총장 돈 다비드 빠글리아니의 회담

쿠리에 드 로마 제17차 신학대회

2024113일, 파리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 세상에 귀를 기울이는 시노드 교회


“이 시노드 교회는 천주님 백성들의 감정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채 모든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단지 공상적이고 천년왕국에 불과하다!”


‘시노드 교회’가 추진하는 다양한 현실과 관련하여 저의 종합적인 생각을 제시하고, 성비오10세회의 입장을 설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선, 이 시노드 교회와 관련된 모든 다른 요소들, 특히 최근 문서인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에 대한 이미 상당한 양의 논평이 생겨난 것들에 어느 정도 질서를 부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을 그 진정한 맥락에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게 나왔을까요? 그것은 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비오10세회(SSPX)의 역할은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이 글에서 무엇이 위험한지에 대한 이해를 가능한 한 깊게 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분석의 깊이가 부족하다면, 우리는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의 문제를 프란체스코 교황의 개인적인 기발함으로 축소화하고, 그의 분방한 언행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같은 함정에 빠질 위험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간청하는 믿음에 대한 다른 반응들은 이러한 ‘축복’의 문제를 기회의 문제로 축소시켰고, 이러한 계획은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서, 특히 아프리카에서 부적절할 것입니다. 사실, 현실은 오히려 더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다른 반응들은 확실히 환영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훌륭합니다. 하지만, 성비오10세회는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언론의 소란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시작합시다. 

I. 현대 세계의 기대에 부응하는 교황

엄밀히 말하면 간청하는 믿음은 시노드 문서가 아니라, 신앙교리성이 제작하고 교황이 직접 서명한 문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노드 준비 과정에서 많이 제기된 내용에 부응하는 문서입니다. 따라서 이 문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노드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의하고자 하는 이 ‘시노드 교회’란 주변 사람들과 풀뿌리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 즉 완전히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절대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교회입니다. 바로 ‘이 세상’ 그 자체의 말을 들어주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감수성과 밖으로 나가 이 세상을 만나려는 새로운 의욕을 가진 교회입니다.

현실적으로, 현재의 교황은 가장 넓은 의미의 현대 세계,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 세계의 기대와 요구에 점점 더 완벽하게 부응합니다. 사실, 한편으로는, 이 교황은 오늘날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정치적 시각에 부응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또한 새로운 사회 조직을 만들기를 추구하는 정치적 방법에 적응했고, 그리고 그것은 인정받아야만 했고, 이미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의 대표자들의 존재가 이 세계의 재편성에서 그렇게 중요한가요?

우리가 이런 방식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새로운 원리가 도입되거나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지고 재편될 때, 종교기관은 이러한 원리들을 ‘신성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꽤 분명하며, 인간의 마음에 뿌리를 둔 필연성에 해당합니다. 인간은 깊은 곳에 항상 종교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것을 믿어야 하며, 따라서 심지어 기본적으로 전혀 신성하지 않은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종 무의식적인 필요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신(神, 천주)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리고 심지어 혁명조차도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신성한 것은 우리가 믿는 것과 우리가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원칙에 초월적인 차원을 부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람들에게 부과됩니다. 여러분은 역사에서 이것을 꽤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고대 문명들은 그들에게 중요했던 모든 것을 신성시했습니다. 그들은 권력, 힘, 불, 대지, 풍요함 등을 신성시했습니다. 현대에 더 가까운 곳에서는 자유주의 혁명이었던 ‘프랑스 혁명’도 같은 일을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근본적으로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종교 등을 포함한 구체제의 일부였던 모든 것에 대한 탈신성화를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 혁명은 인간의 이성을 있는 그대로 ‘신성한’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자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예는 인권선언일 것입니다. 인권선언은 매일 – 특히 이 시대에 – 행해집니다. 최선의 경우, 대부분의 선언들은 몇 주 동안 기억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확실히 영원히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인권선언은 역사에 영구적인 흔적을 남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왜 그럴까요? 인권선언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 그것은 완전히 본격적인 신경(信經)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앙고백과 같은 엄숙함을 담아 쓰여 졌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새로운 원칙과 현대 사회가 건설되어야 했던 이 새로운 교리를 신성하게 만들고자 하는 종교적인 필요에 부응합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예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불행하게도, 그들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세계의 눈에 근본이 되는 신성한 것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단지 몇 가지 예가 있을 뿐입니다. 생태학이 성부(聖父)에 의해 전도(傳道)되고 가르쳐짐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생태학적’ 신학은 단순히 역사의 한 순간과 연결되는 편의주의에 대한 고려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게 전도된 새로운 도덕성입니다. 그것은 무신론자들에게도 제안된 초월적 도덕성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천주님의 손에서 비롯되었다는, 우리가 ‘창조’라고 부르는 이 공동의 집(자연, 대지)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가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부르든 간에, 모든 사람의 공동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성격, 원한다면 선포문에 양각(陽刻)된 종교적인 도장, 그리고 오늘날의 정치 세계의 긴급한 요구를 내포하고, - 그래서 교회가 개입하여 교회의 종교적인 도장을 주었는데, 우리가 보았듯이, 이것은 매우 진정한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는 위계질서를 해체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회의 위계적인 시각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 그리고 교회의 위계적인 시각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권력이 더 이상 위계적이지 않은 사회를 옹호합니다. 권력은 분산되고 재분배됩니다. 그래서 권력을 공유하고, 성직자주의에 맞서 싸우고, 여성의 해방을 촉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이것은 한동안 의제가 되곤 했던 주제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여성들이, 심지어 정부의 위계적인 구조 안에서도, 그들 자신의 자리를 갖기를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역사를 통해 여러 권력 남용의 체계적이고 제도화된 원인으로 여겨지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대항하기 위해 제시됩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이에게 제시되고 있는 이들 현대적인 가치 가운데, 그리고 특히 교회가 이 가치를 신성하게 만들 수 있도록 제안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LGBT의 의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방금 언급된, 그 ‘가치들’을 포함하여, 필연적으로 현대의 감성에 부응되어야만 하는, 시노드 감성의 구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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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오늘날 세계인의 눈에 근본적인 신성한 것들을 부여하고 있다. 간청하는 믿음은 정치적 필요에 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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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의 관심을 받을 만한 또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신뢰성을 잃었고, 따라서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교회는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최신’인 것을 설교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세상에서 교회가 자기의 사명인 초자연적인 차원을 보지 못한 채, 교회는 그 위신과 신뢰성을 잃었기 때문에 세상과 ‘복잡성’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의해 이해되기를 원하면서, 세상과 같은 언어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끔찍한 환상입니다. 교회가 수평적인(평등한) 관점으로 교회 자신을 제한하도록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간청하는 믿음을 적절한 맥락에 놓는데 도움이 될 최초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해야만 했을까요? 자, 역설적이게도, 세속 세계에는 아직도 교회와 오직 교회만이 줄 수 있는 이 종교적 ‘도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신뢰를 잃은 교회에는 여전히 세상이 필요합니다! 이 이중적인 필요가 진정한 공생, 즉 이 정치적 지형 위에서 시너지를 창출했습니다.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는 지금의 정치적 필요에 부응합니다.

II. 교회의 발자취를 현대의 정치적 감성에 맞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제의 핵심에 이르기 위해 잠시 철학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현대적 정치적 관점은 현대적 사유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대적 사유의 성찰과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현대적 사유는 그것이 집단적이든 개별적이든 새로운, 즉 양심이라는 근본적 범주에서 출발합니다. 현대인이 먼저 자신의 사유를 재구성하고, 다음에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재구성할 것이라는 것은 그의 양심에서 비롯되는데, 이런 세계는 교회조차도 적응해야 할 세계입니다.

그러나, 양심을 다른 모든 것의 원리이자 토대로 삼는다는 것은 현실과 분리된 원리를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현실과 분리된 원리는, 모든 경우에, 지성에 대한 수위성(首位性)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파악되어야 할 객관적인 질서가 존재하며,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이념을 넘어서게 됩니다. 아니, 이런 새로운 질서 속에서, 질서를 확립하는 것은 인간이며, 이 질서를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양심이며, 그 후, 이 이념의 토대 위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합니다 – 이것이 가장 넓은 의미의 현대 정치학입니다.

말하자면, 사물의 질서 안에서 더 이상 최종 목적성이나 완전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나 사회의 행복은 더 이상 자신이 받은 최종 목적성 안에서, 그들의 본성에 부응하는 최종 목적성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물의 외적 질서는 더 이상 양심이 지금 규정할 것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양심 그 자체가 세상에서 새로운 질서의 새로운 원리이며… 따라서, 사물의 객관적 질서에 대한 존중 속에서 더 이상 최종 목적성이나 완전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현대 정치에서 불가분의 네 가지 특성을 발견할 것이며, 이는 교황 프란체스코 교회에서, 시노드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될 것입니다.

우선, 현대 정치는 이념적입니다. 그것이 현실을 양심이 스스로 만들어 낸 자유로운 재현으로 대체하는 한, 그것은 이념적입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대변합니다: 이념은 현대 정치의 모든 표현을 동반합니다. 모든 정당 뒤에는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오로지 주관주의적 이념만이 있을 뿐입니다.

현대 정치의 두 번째 특성은 자기 결정성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정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인간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스스로 결정합니다.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현실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지 않고, 스스로 계획과 설계를 구성합니다.

현대 정치의 세 번째 특성은 그것이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입니다. 수세기 동안, 그리고 특히 자유 혁명 이후로 선전된 ‘자유’의 이미지 이면에는 현대 정치가 전체주의적인데, 왜냐하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조차도 그것에 부합해야 하는 것은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개인 또는 집단 양심에서 구상된 아이디어가 구체적 현실 위에 도배되고, 따라서 현실은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전체주의가 나옵니다. 우리는 생각이 현실 위에 도배되고, 현실을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강요하는 전체주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특성은 그것이 협정적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정치는 사물의 자연적 질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협정적 질서에 기초합니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더 이상 현실을 검토하는 것에 기초하여 이해되고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양심에 의해 임의대로 결정되고 선택됩니다.

현대 정치의 이 네 가지 특성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특히 시노드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시노드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기 전에, 가톨릭교회가 이 현대성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선택은 없습니다:
• 교회는 현실과 천주님의 계시에 대한 양심의 수위성을 견책하기도 하고, 거기서 나오는 현대 정치의 모든 것을 책망하던가;
• 아니면, 교회가 이 새로운 시스템에 들어가거나.

하지만, 이 제도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진 이 새로운 시각은 어디든지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우리 자신을 너무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하면서, 이것을 너무 많이 견책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면서, 협상하려고 하면서, 그것으로부터 긍정적인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 우리가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무엇을 했습니까?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교회는 단지 이 제도를 견책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이 제도에 가입했습니다. 스스로 그것을 만들었고, 이제 교회는 그것을 축복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데 참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시노드 교회는 나름대로 이념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을 오직 고안한 사람들의 마음에만 존재하는 사목적 필요성을 만들어 냅니다. 교리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생산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정말로 이 세상에 가톨릭교회의 축복을 요청하는 성소수자 커플들이 수백만 명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방금 본 이유들로 인하여, 오늘날 교회가 신호, 즉 몸짓을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청하는 믿음과 같은 문서들은, 축복을 요청하는 실제적인 요청들과 상관없이, 사목적 요구와는 관계없이, 그리고 실제로 주어질 축복의 숫자와 관련 없이, 세상을 위한 정치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전체 주교들이 반대하더라도, -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서들이 저들들의 정치적인 중요성을 위해 쓰여 지고 출판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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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드 교회는 전체주의적이고 이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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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시노드 교회에는 자기 결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더 이상 천주님께서 불변의 목적과 불변의 사명을 가지고 주신 불변의 구조물로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역사적 상황에 따라, 특히 무엇보다 순간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를 되살리고, 그리고 새로운 최종 목적성을 부여할 수 있지만, 항상 진화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시노드 교회는 또한 전체주의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교회는 사회적 기관으로서 그것에 고유(固有)하지 않은 원칙에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물의 현실은 심하게 왜곡되고 있고, 따라서 다양한 반응들 – 그것들이 완벽하든지 또는 완벽하지 않든지 -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 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모든 사람이 말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시노드 교회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으며, 동시에 특히 프란체스코 교황의 경우, 혹은 최소한 그 교황 재임 초기부터 – 매우 권위주의적인 행동을 강요하는 교회 사이에 - 이런 모순이 있다고 자주 언급되어 왔습니다. 이 모순은 지적되어 왔는데,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시노드 교회는 전체주의적입니다! 비록 그것들이 이것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이론적 개념과 생각들이 현실 위에 도배되어 있습니다. 폭력이 당신의 방식대로 일들을 강요하기 위해 사용될 때, 당신은 전체주의적입니다. 모든 사람의 말을 듣는다고 동시에 주장하면서 교회의 권위가 일들을 강요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노드 교회 또한 협정성(協定性, conventional)입니다. 이론적으로, 정부의 선택을 제시하는 것은 시노드의 기본입니다. 결정된 것은 항상 그렇게 제시되는데: 천주님의 백성들은, 전체적으로, 그들의 합의된 믿음을 통해, 특정한 길이나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현재의 사건들을 이해하는 것을 도와주는 열쇠를 줍니다. 이 교황의 주요 결정들은 이것아 수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 오늘날 세계와 – 그리고 정치 세계의 주요 원칙에 최대한 매우 가깝게 따르기 위한 열망으로 보아야 합니다. 

III. 혁명적 도구인 시노드

이제 이런 맥락에서 시노드를 그렇게 보도록 합시다. 시노드가 해야 할 특별한 역할이 있는가요? 저는 여기서 신학적, 교리적 측면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노드는 풀뿌리부터 교회를 함께 다스리려는 (주교) 단체주의의 단순한 표현입니다.

이와 함께, 실용적인 것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시노드의 ‘정치적인’ 기능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목적은 무엇인가요? 시노드는 그들이 전수하고 싶어 하고, 법으로 변화하기를 원하는 생각들을 천주님의 백성들의 기대나 요청 또는 심지어 필요로 돌림으로써 순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당연하지만, 교회가 모든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신앙의 감각’에 의한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연적인 일이지만, 천주 백성이 구하는 모든 것 속에는 오늘날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모든 것을 반복해서 찾을 것입니다 

1년 조금 전에 발표된, 시노드의 실무 문서인 Instrumentum laboris[1]을 보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거대한 덩어리이며, 모든 것이 다 있고, 그 안에 모든 것이 반대인, 형체가 없는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서를 손에 들고, 당국은 그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지금이 이 시점에 대해 행동해야 할 순간이고, 시간이 무르익고, 상황이 준비되고, 우리는 이 시점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의 필연적인 결과는 무엇일까요? 교리적 원리에서 출발하지 않고, 그리고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고, 오직 모든 사람들의 기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항상 ‘예’라고 말함으로써, 모든 것의 반대에 항상 ‘예’라고 말함으로써, 결국 현실과 동떨어진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과의 단절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시노드 교회는 천주님의 사람들의 감정 속에 발을 단단히 딛고 – 모든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단순히 유토피아적[어디에도 없는 곳, 공상적]입니다! 간청하는 믿음에 의해 고안된 이 ‘축복’은 단지 실수가 아니라, 공상적인 것입니다. 말이 안 되고, 그 이면에는 완전히 쇄신된 교회가 그 뒤를 따르는 – 신세계에 대한 키메라(역자 주 - 다른 동물들이 일체화 된 상상의 동물을 말하며 그리스 신화에서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뱀의 형상을 가진 동물)적인 꿈이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완전히 쇄신된 교회와 함께 있는 신세계라는 키메라적 꿈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천년왕국입니다. 그것은 유토피아이며 천년왕국의 환상이며 완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알고 설교하라고 부르는 구체적인 현실 – 참된 현실 – 은 복음서의 실체, 가톨릭 교리의 실체, 천주의 계시 실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 가톨릭 도덕의 실체, 죄와의 싸움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개혁가들에게, 이 모든 것이 더 이상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추상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천주님의 백성들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모든 공상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구체적인 현실로 여겨지며, 교회의 교리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과 근본적으로 모순됩니다. 교회의 교리는 그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추상적인 진리로 치부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체제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체제에 묶여 있고, 이 체제에 빠져 있고, 이 체제에 매혹되어 있고,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교회는 듣고, 모든 사람의 모든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며, 어떤 최종 목적성이나 궁극적인 완벽성도 나타내지 않습니다. 어떠한 초월성이나 얻으려는 최고의 선도 없습니다 - 오늘날 누가 영원한 생명에 관해 이야기하는가에 관해 이야기하는가요?

오늘날 교회의 상황을 보세요! 지금 교회는 이러한 ‘축복’에 대한 전 세계적인 논쟁을 겪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가 어디에 있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 모든 주교들과 전 세계가 동성애자들에게 축복을 내릴지 말지를 놓고 논쟁하고 있지만, 우리는 더 이상 복음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되신 주님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더 이상 성화 은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십자가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 왜냐고요?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계급(위계)구조는 1968년 이후 가정에서의 아버지들의 계급구조와 유사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1968년 이후 환멸을 느낀 아버지들인데,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왜 아이를 가졌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합니다. 1968년의 위기와 그에 따른 점진적 악화 이후, 가정에 있는 아버지는 자신이 왜 아버지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자녀들을 무엇을 교육해야 하는지, 또 왜 교육해야 하는지도 더 이상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아버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에서 성취해야 할 목표가 더 이상 없다면, - 그것은 완전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정당화합니다 – 가정은 깨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족을 함께 모이게 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그의 역할은 단순한 물질적인 구체적인 요구에 응하는 것으로 줄어듭니다. 아이는 배가 고픕니다: 그러면 아이는 음식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학교에 보내집니다. 그는 운동이 필요하고, 의사가 필요하고, 옷이 필요하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우리는 왜 그런지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목적을 나타내는 대신에,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양한 요구사항에 대한 유일한 답이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이유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우발적인 대응일 뿐입니다. 이것은 파멸적입니다.

시노드의 교회는 1968년 이후의 가정에서 이러한 축소되고 핸디캡을 둔 아버지상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종종 무엇을 요구할까요? 틀림없이 교육이나 지도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최신의 변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IV.  간청하는 믿음: 옛날 이야기

이와 같은 다양한 고찰을 통해, 미혼·동성 커플들을 축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이면에 그 이유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최근의 사건을 훨씬 더 오래된 이야기의 새로운 장(章)으로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사실 교회가 현대 사회의 압력에 굴복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이해해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런 압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강요가 강한 것일까요? 교회가 결정한 것의 심각성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교회가 받는 압박의 정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한 가지 원리를 생각해 내야 합니다: 혁명은, 정의(定義)에 의해 기존 질서를 파괴합니다. 저는 여기서 가능한 모든 종류의 혁명을 포괄하는 가장 넓은 의미의 대문자 ‘R’자를 가진 혁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혁명은 기존 질서를 모두 파괴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구별이 없는 곳에서는 질서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구별을 파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족에는 왜 질서가 있는가요? 구별이 있기 때문에 질서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도 아니고, 할아버지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딸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가족에는 자연적으로 성립된 기존 질서가 있으며, 각 구성원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며, 이는 가족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합니다.

혁명은 모든 질서를 파괴하기 때문에,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모든 구별을 파괴해야 합니다. 왜 그것이 파괴되어야 하는가요? 이 원리들을 신학적인 방법으로 살펴봅시다. 혁명이 모든 구별을 파괴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단순히 구별들이 한 방향으로 혹은 다른 방법으로 파생되거나, 또는 가장 근본적인 구별로 이끌거나, 인간과 신성의 구별, 즉 인간과 천주와의 구별로부터 비롯되거나 혹은 파생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혁명은 자신과 천주와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은 루시퍼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혼합한 현대주의의 전체 전쟁 계획은 단지 이 혁명의 시연(試演)일 뿐입니다. 인간의 양심을 신성시하는 것은 이러한 근본적인 구별을 없애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은 선악의 원리가 됩니다. 인간은 진리와 거짓의 원리가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상식과 연결된 모든 전통적인 구별들은 이미 언급된 이러한 근본적인 구별의 흔적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억눌려져야 합니다. 그것들은 인간과 천주님 사이의 최초이자 궁극적인 구별의 반향(反響)입니다. 이러한 구별들은 –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 재고되어야 할 거부된 질서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언어가 자주 간섭을 받습니다: 특정한 표현들과 특정한 단어들은 더 이상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악마화되고, 특히 그것들이 전통적인 구별들을 반영하는 표현들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몇 가지 예로서 교사와 학생, 고용주와 피고용자, 부모와 자녀,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전통적인 구별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나라 사이에도 구별이 있고, 혹은 종교적 교의도 구별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들이 없어지거나 최소한 재평가됩니다. 사람들의 공통점인 지구, 공동의 집, 인간의 존엄성, 인권 등등에 중점을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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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노드의 첫 번째 회기(2023년 10월)을 위한 작업 문서인 “여러분의 텐트의 공간을 넓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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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로 파괴된 질서를 다시 세우라, 역사를 통해 혁명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가톨릭교회의 사명이며, 이것이 성육신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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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구체적으로 말하면, 파괴되어야 할 최종적인 구별은 무엇인가요? 인간과 모든 동물의 육체적 본성에 가장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구별은 무엇인가요? 창조 당일 천주님의 손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구별은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이 구별은 무엇인가요? 천주님은 그들을 남성와 여성으로 창조하셨습니다.[2] 천주님은 수컷과 암컷 동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천주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구별은 최초이자 가장 명백한 것이며, 이 구별로 천주님은 매우 구체적인 기능과 매우 구체적인 역할을 연결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구별(구분)을 없애거나, 세상이 이 구분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부성(父性)의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부성 혹은 부성은 여기 이 땅에서의 천주님의 권위의 발산이며, 적용입니다. 이 아름다운 개념은 천주 계시의 일부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사람은 바로 성 바오로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천주님의 창조적 사명의 확장으로 보는 아버지는 너무나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고 파괴되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지어 남성(수컷)인지 여성(암컷)인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성에 도달하기를 원합니다. (저들에겐) 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이 구분은 지워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 과정은 아주 먼 길을 왔고, 아주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모든 내면과 내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 가장 깊은 신학적 의미의 – 악마의 사악한 의지가 있습니다. 이 구분을 처음으로 거부한 사람은 사탄 자신이며, 그는 모든 사람이 – 예외 없이 – “여러분은 신과 같이 될 것이다”[3] 라는 같은 길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구별들, 특히 이 마지막 (남자와 여자) 구별들의 제거는 인류의 자멸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더 이상 아버지도 없는 인간입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아버지나 어머니나 남자나 여자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멸종될 운명의 문명입니다. 그것은 계속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왜 그것은 계속될 수 없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사탄은 살인자이기 때문입니다. 태초부터, 사탄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을 속이려고 노력해 왔고, 그는 성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이 새로운 원칙들과 분명히, 어느 정도의 관용과 뉘앙스를 가지고, 구별의 폐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게임은 교묘하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오늘날 모든 사람은 이런 구별들의 폐지를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일 의무가 있고, 그러므로 그것들이 암시하는 것들의 사물의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육신이 일어났을까요? 왜 가톨릭교회가 세워졌을까요?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교황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러한 과오와 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구별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천주님과 인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뒤따르는 모든 것들의 첫 번째 구별에서부터 시작해서 말입니다. 그들의 역할은 죄에 의해 파괴된 질서를 재건하는 것이고, 구별은 혁명에 의해 역사를 통틀어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톨릭교회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톨릭 성직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세상과 함께, 현대 세계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성 커플에게 축복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여러분은 마침내 간청하는 믿음(동성 커플에게 축복하려는 권고문)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에 무엇이 위태로운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의제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러한 축복이 주어지는지 아닌지는 정말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아프리카에서가 아니라, 그것은 적절한 시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니요! 진짜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이러한 원칙을 축복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V. 교황 홀로 책임인가?

슬프게도,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확실히 우리에게는 걸려 넘어지기는 하지만, 너무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럴 수밖에 없었을까요? 도덕이란 교리와 신앙의 결실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천주, 인간, 영혼, 죄, 속죄(구원)에 대해 제가 믿는 것의 관점에서 저의 행동 강령을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진실하다고 믿는 것을 바탕으로 저는 내 행동 규칙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장 두드러진 오류의 표현인 종교적 자유와 교의와 신앙의 타락을 예로 들어봅시다. 종교적 자유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60년 넘게 설파(說破)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우리의 천주님을 선택할 수 있고, 천주님에 대한 생각을 선택할 수 있고, 또는 심지어 천주님에 대해 전혀 모르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동과 도덕의 규칙을 선택할 수 있고, 그리고 우리가 원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천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나, 또는 천주님이 우리를 만드신 방식(예를 들면 자연법에 대해 기묘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재의 우리가 누구인지 바꾸고 싶고,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왜 안 될까요? 우리가 자신의 천주를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 -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더욱 (a fortiori), 그 이외의 것, 예를 들면 누구와 살 것인지, 누구와 가정 혹은 어떤 종류의 ‘가족’과 같은 것 다른 것도 선택할 수도 있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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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창세기 1;27~28 “천주님이 자기 형상 곧 천주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마테오 19:4 “너희가 읽어보지 아니하였느냐? 당초에 사람을 조성하신 자 일남 일녀를 만드시고.”
말구 10:6 “천지 조성 시초부터는 천주 일남 일녀를 조성하셨으매”

[3] 창세기 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천주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천주님이 아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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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천주를 선택할 수 있다면, 더욱 더 포토리(a fortiori), 우리는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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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예는 에큐메니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즘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종교들 간에 장난입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만약 우리가 에큐메니즘의 정신에 물든다면, 조만간 문란한 도덕이 뒤따를 것입니다. 도덕은 교의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오래 전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릴 필요가 필요했습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상당히 논리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프란체스코 교황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원인이나 원래의 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성비오10세회의 역할입니다

VI.  시대의 징조

이런 양상 속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교회의 위기에 특유한 요소가 있는가요?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 가지만 언급하고 싶은 것이 사리에 어둡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직자들이 눈이 먼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질문을 해결해야 할 때,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이 전통(聖傳)과 연속성을 갖는지 또는 불연속성을 갖는지 스스로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저 모든 것은 이미 구식입니다. 완전한 무지가 있고, 그것이 가장 나쁜 처벌입니다. 사리에 어두운 눈은 분명히 천주님이 주시는 벌입니다. 천주님이 저들에게서 물러났다는 신호입니다. 천주님이 빛을 철회하셨습니다. 이것은 천주님의 대답입니다. 그분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천주님은 왜 침묵을 지키시나요? 저들은 육십 년 동안 천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주님은 물러났고, 이제 그분은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이 더 이상 없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줍니다. 천주님은 그분이 물러난 결과를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세상에 사로잡히게 된 사람, 세상이 주는 안락함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 무엇보다도 세상 자체를 수용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부과되는 형벌입니다. 머지않아 세속에 사로잡힌 그는 장님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그 미묘함으로 그를 멀게 합니다. 세상은 마음을 멀게 하고, 의지를 무너뜨립니다. [천주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못된 모든 것을 비난하거나, 또는 자신이 속아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러면 머지않아 당신은 눈이 멀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초자연적인 감각과 올바른 판단에 대한 완전한 상실이 뒤따릅니다 - 복되신 삼위일체와 속죄(구원)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실들에 대한 판단의 상실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현실들에 대한 올바른 판단의 상실이 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명백한 구별[예를 들면 남녀의 구별]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이러한 구별들을 방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마음의 장님입니다.

60년 동안의 실수와 혼돈과 거짓말이 있었습니다. 60년 동안 세상에 항복해 왔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동성 커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VII. 양심의 우월성에서 왕 그리스도의 우월성으로

그래서 해결책이 있나요?
물론이죠! 예! 그리고 첫 번째 해결책은 천주님의 성총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을 즐겁게 하려는 이 욕망, 세상과 모순되는 이 두려움은 순전히 자연스럽고 순수하게 정치적인 사물의 시각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을 그토록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시각이며, 거기서 성총의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세계관입니다. 이 세상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욕망과 이 세상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순수하게 자연적이고 순수하게 정치적인 시각에서 비롯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이 말을 정말 강하게 합니다. 성총은 단순히 관점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성총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초자연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이 취한 방향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성총은 없습니다. 이 세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구원은 없습니다. 앞으로의 구원은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총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주님의 성총을 믿는 결과인 성총과 함께하는 또 다른 해결책은 르페브르 대주교께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리고 강론할 때마다 주장했던 해결책입니다. 그것이 천주 성총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보물의 정수(精髓)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전적으로 그것에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주 간단한 해결책입니다. 

바로 왕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왕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세계와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이신 그리스도께 돌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지성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마음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초자연적이고 자연적으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만약 우리가 초자연적인 빛을 잃는다면, 조만간 가장 명백한 자연적인 사물들에 대한 빛을 어떻게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분은 또한 마음의 왕 – 진정한 사랑의 왕 – 진정한 애덕의 왕이십니다.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모든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애덕의 개념이 사라졌을 때, 속죄(구원)의 개념이 사라졌을 때, 천주의 개념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 심지어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 추잡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애덕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여러분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축복받은 것이지만, 그러나 어떤 종류의 사랑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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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왕은 추상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분은 단순한 꿈이 아닙니다. 그분은 몽상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교회에 주어진 유일한 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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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왕, 마음의 왕, 진정한 애덕의 왕… 그리고 그분은 국가의 왕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축복한 이 모든 잘못된 원칙들의 모순을 보아야 하고, 그 중대성과 결과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파멸적인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습니다. - 세상은 전쟁 중입니다 -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그 누구도 그 해결책이 왕이신 그리스도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초자연적인 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은 심지어 자연적인 빛도 잃었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탐구는 언어의 가장 숭고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문제이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프로그램도 포함합니다. 우리의 상황, 교회의 현주소에서 왕이신 그리스도의 지고성(至高性)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 교리, 이 교리, 이 원리 등의 포기가 무엇을 초래하는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와 세상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추상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단순한 꿈도 아닙니다. 꿈같은 이야기도 아닙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부흥시키기 위해 교회에 주어진 유일한 수단이며, 이 수단은 교회에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입니다. 교회가 세상 안에 있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교회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이해할 수 있고 인류에게 바칠 수 있는 수단이 그리스도 왕입니다. 그리스도 왕은 교회의 보배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사회적 교리의 정수(精髓)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이 위임된 것은 교회 혼자입니다. 교회만이 홀로 설교하고 열매를 맺게 할 수 있고,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왕 중의 왕께서 사람들 위에 통치하실 수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입니다[4]. 요왕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