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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대의 새미사는 나쁜가? -프랑소와 레네 신부(Fr. Francois Laisney)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1-02




현대의 새미사는 나쁜가?

프랑소와 레네 신부 (Fr. Francois Laisney)


조직체내에 성비오10세회가 유일한 참된 가톨릭이라는 비난이 때때로 쏟아졌다. 사실 이와 같이 빗대어 말해지는 것이 비오10세회 자체도 10세회 사제들에 의해 이루어진 곳은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논쟁은 제기될 수 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톨릭신앙을 가져야된다. 가톨릭 신앙은 변경될 수 없는 드러난 진리에 대한 지성의 고수(固守)이며 즉 계시는 성서와 전통 속에 있다. 그 계시는 변경할 수 없다. 이는 반드시 완벽함속에 그 안에서 보전되고 전해져야만 한다. (넓은 의미에서 전통은 성서를 포합하는데 이는 가톨릭교회가 성서의 안내자 역할을 해 왔을 때부터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의 전통에 대한 신뢰는 구원에 있어 필요하다.


 여기서 언급되어야 할 점은 전통이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교회의 실생활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단지 우리 주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코린도1. 11:1)라고 하신 것처럼 주님의 덕행을 실천하는 본보기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거룩한 성사의 경배는 실제 현존에 대한 첫 번째 실천적인 신앙의 공언(公言)이였다. 이점에 관한 완전한 교리는 그 후 더 많이 명백해졌다. 지금 그것은 올바르게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사람은 반드시 교회에 관한 주님의 계시된 진리를 옹호하는 의향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진리들은 대대로 우리에게 충실하게 전해져야 한다. 이 신앙의 각 요소를 (세밀하고) 명확하게 알 필요는 없다. 형식적 오류에 대치되는 본질적 오류나 그 밖의 다른 점이 일어나기조차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교회의 신앙’ 에 공식적으로 고수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신앙은 ‘전통적인’것이 필요하다. 교황은 이를 선언하고 정제하고 설명하며 옹호할 수는 있으나 변경시킬 수는 없다.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성신은 주님의 계시에 의해 새 교리를 선포하도록 베드로 후계자들에게 약속된 것이 아니고 종도를 통하여 전달된 계시와 신앙의 증거를 성신의 도우심으로 성스럽게 보호하고 충실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DZ 1836)'


 최소한 부분적으로, 사람들은 단지 전통적인 예배당보다는 전통이 옹호되는 것을 찾고 이들 여러 장소에서 전통이 옹호된 가운데 면밀히 성총의 열매를 찾는다. 예를 들면 로사리오 기도를 암송하는 자들, 현대의 부도덕성에 대항하는 자들, 자기 교구 내에서 영속적인 성사 경배를 조직하는 (교황 바오로 2세가 치하했던) 사제들인 것이다. 이들 모든 사제들과 충실한 신앙인들은 전통적인 원리를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공식적으로 지켜간다.


 이와 같은 진리로부터 전통의 원리에 오직 완전하고도 명확한 회귀만이 교회 내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를 치료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는 것을 결론 내릴 수 있다. 성비오10세회는 교회 내 적절한 장소에서 전통에 충실한 커다란 원리가 이루어지도록 싸우게끔 봉헌되어 있다.


 이점이 바로 우리가 aggiornamento (가톨릭 현대화)에 의해 도입된 파괴적인 변혁과 타협할 수 없는 이유이다. 구원에 대한 이와 같은 원리와 우리 싸움의 중심이 성비오10세회 사제들에 의해 봉헌된 미사에 참여하는 자만 오직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와 반대로, 변화될 수 없는 가톨릭 신앙에 충실하게 남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천주께 감사!)이 불행히도 어느 한쪽 또는 다른 관점을 바라보는데 있어 본질적 오류에 처한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이 오류는 현재 커다란 위기와 혼란 탓으로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전통미사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특히 이 원칙은 지켜져야 하는 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항상 대대로 내려온 신앙에 열심이어야 한다. 오로지 이 원칙에 완전하고도 개방된 회귀야 말로 교회가 처한 위기 상황을 회복할 것이다.


어떻게 개혁이 나쁜가?

 

성비오10세회는 개혁이 모두 해악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르페브르 대주교께서는 “공식적으로 찬성된 개혁은 형식적으로 이단이 아니다.” 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몇몇 혁신은 공식적으로 찬성된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실행된 것인바 – 예를 들어, 비가톨릭인들과 경배 행위에 참여와 같은 - 이는 이단적이며 십계명의 첫 계명과 가톨릭 신앙의 원리를 부인하는 실천적 행위이다. 비록 그 의도가 신앙을 부인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명백히 그와 같은 행위들은 아주 엄한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이다.


직접 와 닿는 문제는 공식적으로 찬성된 개혁에 대한 태도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다. 객관적 접근법은 개혁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위 접근법은 교회 내 권위를 가진 사람들 (특히 교황)부터 오는 사실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우위 접근법 때문에 권위를 갖는 그들이 행한 개혁이 나쁠 수  없다고 분별없이 결론을 내리게 된다.


「 파괴된 로마 가톨릭 의식」 이나  「교황 바오로의 새미사」 (마이클 데이브 저 Angelus 출판부) 와 같은 많은 소책자에는 새미사 그 자체에 관하여 객관적 접근법이 적용된바 이것으로부터 온 것은 많지 않다. 다른 평론가들은 그 자체 새로운 의식이 별로 없고, 오히려 교황에 의해 찬성된 것 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들은 두 접근법으로 이리 왔다 저리 갔다하는 비논리적 자세를 견지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영국 성공회 개혁에서 일어났던 일과 새미사의 속임수 사이에는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과, 바오로 6세의 새미사는 마르틴 루터의 주님의 성찬보다도 더 훨씬 근본적으로 멀어진 점을 인정하며 토마스 그랜머(역자 주: 영국 성공회 개혁주의자)가 없앤 많은 기도와 의식은 역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제거되었고 새미사의 골격은 명백한 에큐메니칼적인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졌으며 신앙에 해악을 끼치는 라틴의 전형적 요소는 없다고 보기도 한다.


 정상적으로 두 다른 접근법을 같은 결론으로 이끌어내야 하는데 진리는 하나요, 같은 진리는 다른 접근법으로부터 입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데 있어 정상은 하나요, 거기에 도달하는 등산로는 다를 수 있으나, 어떤 길들은 보다 모호하고 어떤 길은 더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객관적 접근


 이 접근법은 마이클 데이브의 초기 분석에서 나타나는 바 “전례상의 의식은 전례가 무엇을 담고 있느냐를 표현해야한다. 가톨릭 위격이 의심이 될 만한 의식과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의식 뒤뜰에 교리에 대한 전례상의 표현이 되는 기도의 제약, 억압은 관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트리텐틴 공의회 신학 이론과 동떨어진 새미사의 내용은 크랜머에 의해 제기된 이들 의식으로 인해 전례가 제기된 consilium 의 기도와 비교함으로써 가장 잘 계측될 수 있다. 이 우연의 일치는 충격이라기보다는 전율스런 것이다. 사실 우연의 일치일 리 없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개혁자들이 그들의 목표를 성취했던 특히 이단적인 기도들의 도입이라기보다는 제거인 것이다.


 나는 「크랜머의 경건한 명령」에서 그의 변화들을 상당히 묘사하고 있는 방법론에 들어가고자 해왔다. 알아낸 그의 변혁 단계를 인용하는 것을 뛰어 넘어 여기서는 그 증거를 반복하지 않겠으나 최근 개혁동안에 첫 세 가지는 이미 반복되어진 것이다. “첫 단계는 자국어 속에 변화되지 않는 전통미사의 일정 부분을 갖추는 일이다. 둘째 단계는 옛 미사에 새 요소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전혀 특별한 이단적인 요소가 없도록 조치하는 것이고 세 번째 단계는 이단적 요소가 없는 자국어 영성체 의식을 옛 미사와 대체하는 것이고 넷째 단계는 개신교적 요소를 이 의식과 교체하는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새미사는 새미사의 선언과 실체가 드러나는 명백한 분석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은 아주 우수하여 많은 이들이 전통 미사에 회귀하도록 지속적으로 돕고 있다. 이 책은 새미사의 우수한 점을 설파하기 보다는 새 미사의 해악적인 요소를 주로 밝혀 주는 것이다. 이 객관적 접근법은 르페브르 대주교 및 많은 다른 전통 사제들과 충실한 신앙인들의 견해와 같은 것이다.


 개혁에 대한, 객관적 접근법과 벗어난 이 결론은 바로 이것이 모든 요소 요소에 대개 세속과 비가톨릭인들을 반대하는 가톨릭 신앙의 정신 및 공언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데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제거는 전례를 만든 부니니 뿐만 아니라 교황 바오로 6세 자신(교황 바오로의 새미사에 서명한)에 의해 의도된 것이다. 이것들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조직적으로 만든 것이다. 여러 가지 생략된 이것들은 항상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완벽하지 못한 이 제거된 요소들을 개혁자들이 선택 사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로마교회법의 여러 가지 기도들이 선택 사항이 된 것이다.


 새미사 교회법의 본질은 Taize (개신교 교회 일치 운동 위원회)가 새미사 사용하는 것을 막지 않고 단지 합당할 만한 「성체기도」 에 선택적으로 사용된다.


 칼멜 신부는 현대의 개혁자들이 가톨릭 신앙의 명료한 표현을 애매모호한 것으로 대체 하였다고 자주 말했다. 그들은 애매모호한 형식을 채택하고 뚜렷이 드러나는 교리를 제거한 것이다. 그들의 핑계는 비가톨릭인들이 보다 더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람이 개종의 생각을 바꾸지 않은 한 그들을 회두시키려는 우리의 목적이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이와 같은 자세는 솔직한 자세가 아니라는 점을 올바르게 인식하여야 한다.


객관적 접근법의 실제결과


 영혼을 사랑하는 사제들과 사제들을 돌보는 더 많은 주교들이 새미사에서 드러난 체계적인 소홀은 모든 영혼과 특히 사제들에게 있어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들 체계적으로 없애 버린 요소들은 새미사가 그 자체 나쁜 것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좋은 요소들은 결핍되고 나쁜 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새 미사의 나쁜 점이 영혼에게 해악을 끼친다. 새미사가 만들어진 지난 26년간 이점이 한층 명확해졌다. 주교들과 사제들이 새미사의 해악을 알며 부모들조차 새미사의 해악의 결과가 자기자녀들에게 미치리라는 것을 안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의 신앙의 상실에 한탄하여야 하는가? 현대의 새미사는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새미사의 결과를 연구한 모든 솔직한 연구자들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그래서 성비오10세회가 새 미사가 나쁘다라고 말할 때 이는 단지 이단이라고 직접적으로 공언(公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수 불가결해야 할 가톨릭 신앙이 명백히, 그리고 전적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다.


 신앙의 고백은 엄격한 의무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성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는 그 사람을 부끄럽게 하리라(마가 : 8:38).” Don Gueranger는 신앙의 고백을 듣고 신앙을 고백하고자 애착을 갖는 아이들에게 은총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칼맨 신부가 결론 내리기를 “현대주의는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은밀하게, 그리고 교활한 방법으로 모든 곳에서 애매한 말 속임수를 도입함으로써 공격한다.” 현대주의를 주장하는 권위의 면전에서 신앙의 고백을 고수한다는 것은 모든 애매모호한 말 속임수나 교리뿐만 아니라 의식까지도 거절해야 하는 것이 요구된다. 참된 경건과 미사에는 이단의 판결을 받는 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이 마지막 말들을 사려깊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톨릭 신앙의 무류성의 정확성은 파문의 형식을 취하는데 즉 오류의 궁극적인 배격인 것이다. 만약 신앙이 오류와 이단성으로 비난 받는 것이라면 그 신앙은 자신 있게 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성교회의 적은 교회 내에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인 바, 성 교회의 가르침, 전례를 희석시키고 그러므로써 수백만의 영적인 죽음을 일으킴으로 모든 가톨릭인들의 의무는 애매모호함 없이 신앙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모호한 신조와 의식을 비난하고 배격하는 것이다.


  영적인 권위자들은 영적인 삶의 시작이 반드시 모든 도덕에 관한 죄 뿐만 아니라 모든 미묘한 용서할 만한 죄악과 유혹까지도 맞서 싸우는 연옥 생활이라는 점에서 일치하는 것이라고 천명한다. 이것은 죄악에 맞서서 우리의 세 가지 죄악, 육신, 세속, 그리고 악마에 맞서 싸우는 길고도 험난한 싸움인 것이다. 새미사는 더 이상 영혼들이 이와 같은 열정적인 싸움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 내 엄청난 기도의 감소와 죄를 짓지 않으려는 행동 표현의 쇠락으로 비롯되기 때문이다. 새미사의 직접적인 결과는 충실한 믿음을 소유한 많은 이들이 죄악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해 온 것이다. 25년이 넘는 과거 기간에 일어났던 교회에서의 도덕적 타락과 같은 기간 내의 전례상의 변화에는 직접적인 상호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위 접근법의 위험성


 이와 같은 비평에 대항하여 새미사를 옹호하는 우위 접근법은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명백해진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바오로 6세 교황은 유효한 교황인가?’ 라는 단 한 가지 생각에 의해 지배되어져야 된다.


 이와 같은 우위 접근법은 자주 보수적인 가톨릭인들의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산을 오르는데 있어 어떤 길은 다른 길보다 더위 험하다. 그러므로 성 교회의 현재의 위기에서 우위 접근법은 위험하고 영혼을 안전한 행동의 규율로 이끌지 못하나, 그와 반대로 성 교회의 변함없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객관성 접근법은 안전한 행동의 규범으로 이끈다. 우리가 성인들을 따르고, 우리가 성인들의 신앙과 성인들의 미사를 따르면, 그분들의 도덕을 추종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이르는 도상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가톨릭교회는 지금 권위의 위기를 통과하고 있다. 충실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 새미사를 원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열망에 반하여 그들과 대부분의 사제들에게 강요되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의 위기 속에서 교회 내 많은 합법적인 권위를 소유한 이들이 오류를 비난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그들의 의무 실천을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권위의 위기는 교황조차도 건드리고 있다 [Angelus SI SI NO NO '비틀거리는 교황직’을 보라 1997, 2월호] 보수적인 가톨릭인들조차도, 난폭한 주교들이, 특히 미국에서, 교황에게 순명하지 않는 것을 염려한다. 아씨시의 기도모임은 성 교회에 대한 명백한 스캔들이 아니었는가?


 요한 바오로 2세가 그곳에서 이단을 공언(公言)하지 않는 반면, 그의 행동들은 아주 모호하고 그의 말들은 다음과 같은 신앙을 명백히 표현하는데 실패하였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천주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도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종도행전 4:10-12)


 이와 같이 권위의 위기에 직면할 때 있어 우위 접근법의 적용은 두 가지 상반되는 자세로 이끌 위험성이 있는데 1)교황공석주의(Sedevacantism)와 2)공식적인 보수주의... 이 두 가지는 같은 전제를 근거로 하고 있다. 만약 참된 교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는 나쁜 것 일리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이유 가운데 소수의 전제는 다르다. 교황공석주의자(Sedevacantist)가 말하기를 ‘열매를 보고 판단하건대’ 이들 개혁은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이 나쁘며 참된 교황이 아니다. ‘공식적 보수의자’들은 소수의 다른 전제를 갖고 있다. “지금의 교황은 진실한 교황이다. 그러므로 이들 개혁들은 무류성에 의해 보증된다. 그 자체가 나쁠 것 없기에 따라서 나는 그 개혁들을 받아드려야 한다.”


 이러한 두 반대되는 태도는 같은 접근법에 기반을 두나, 오늘날 권위의 위기에 있어 극명하게 보여 지는바 우위 접근법을 받아드리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 나름대로의 어떤 특성이 있는 차이점이 양자 간 이유에 근거하여 있는 것도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권위 가운데 그들의 의무를 행할 때 성신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무를 저버렸을 때 그것들은 사물의 참된 판결에 도달하려는 “성신의 조력” 원리들을 적용하기 무척 어려울 것이다. 성신은 베드로와 그 후 후계자들에게 약속하기를,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쌓아올린 신앙의 증거를 신실하게 지키고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라 했다 결론은? 그들이 권위 속에서 신앙의 기저를 붕괴시키는 변혁을 도입했을 때 그들이 의무를 다한 것이 아니며 성신의 조력을 받은 것도 아니다.


 르페브르 대주교께서는 사탄의 뛰어난 계교가 가톨릭신자들을 순명의 핑계로 전통에 불순종으로 이끄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 우위 접근법의 위험성이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바리새인들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이며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자”라 말씀하셨다.(마카 5:14), 그러므로 죄가 되는 명령을 따르는 행위는 죄에서 면책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보다 천주님께 순종해야 한다.”(종도행전 5:29)


 순명은 신앙의 싸움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나 신덕 도리는 우리의 신앙을 약화시키는 순명을 거절하는 것이 요구된다. 성 토마스는 “순명은 도덕이요, 부족함과 지나침 사이에 올바른 지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부족함은 불순종이며 적법한 명령을 거스르는 거절이고 지나침은 부적절한 영령을 따르는 노예상태이다. 부적절한 명령을 거절하는 것은 순명의 참된 덕이다.” 오직 거룩하고 모든 의무에 충실한 성 비오 10세 교황 같은 분은 “교황과 불화가 있는 곳엔 거룩함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 하셨다. 따라서 신앙의 빛 가운데 순명이 있고 교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황이 신앙의 자산(資産)을 충실히 전달 할 때 마치 주님을 통하여 성부를 “투명성” 있게 볼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교황에 순종할 때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황이 변혁을 도입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교황을 통하여 주님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다.
 
 새 미사 선언에 관한 우위 접근법의 오류


 이 접근법의 오류는 이른바 ‘오류에 반대되는 보증’이라 불리는 적절한 분별력의 결여에 있다. 교황이 찬성한 이들 변혁에 대해 요구되는 분별력의 결여는 객관적 접근법과 모순되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끈다. 미묘한 차이를 분별할 능력은 적절한 신학을 위해 필요하다. 적절한 이유에 대해 신앙에 주어진 단지 적절한 첫 전제(논리학에서 말하는 주요 전제)만을 갖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대전제에 적용될 적절한 소제들이 필요한 것이다.


 우위 접근법을 자주 취하는 이들은 주요한 원리만을 고려할 뿐 미세한 부분을 드려다 볼 충분한 자료 검토 없이 미숙하게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가 만든 새미사의 단순한 선언이 신앙을 완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지 이와 같은 점에서 생각해 봐야한다. 고려해 봐야 할 첫째 사항은 권위의 차이점이 성 비오 5세 Missale Romanum의 첫 번째 책자에 법령이 포함된 항목 7번의 스캔들은 교황의 완전한 권위가 새미사를 공표하는데 연관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무엇에 관계되든 간에 권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 비오 5세 교황에 의해 성문화된 전통미사의 권위만큼 새미사의 선언에는 그만한 연관된 권위가 없다는 사실이다. 교황 바오로 6세가 성 비오 5세와 같다고 선언하는 것은 교황의 이들 관련 서류의 내용에 대항하는 뻔뻔스런 행위이다. 같은 권이를 소유한 두 교황이 둘 다 같은 권위에 연계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두 번째 고려해야 할 점은 보편적인 법률 제정에 있어 교황의 무류성은 성 교회의 보편적 교권에 속한 가톨릭 교법이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면밀히 규정되지 않았고 신학자들은 이 원리의 법률적 한계를 토론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전례를 공포하는데 관련된 차이점은 합법성에 있다. 사람은 매우 이성적으로 무엇인가를 부과한 법률제정과 무엇인가를 허용한 법률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만약 어떤 행위를 단지 허용한 교회법이 무류성에 의해 보증되어 진다면 손으로 받는 영성체와 여자 복사의 허용도 포함될 것이다. 등등....


 이와 같은 교회법이 수많은 영혼들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안 끼쳤다고 감히 말할 자가 누구겠는가? 작가가 책자나 법령에 권위를 부여했을 때 그것이 그에 연관된 작가의 권위보다 더 많은 권위를 갖고 있다고 사칭할 수 없다. 교황 바오로 2세는 로마에서 개최된 새 교회 성문법에 관련된 신학적 위임 책자에 나오는 in forma specifica를 찬성하였다. (최종적으로 법률 위원회에서 같은 본질과 힘을 1883년 교회성문법에 고려하지 않고 이를 자주 인용하였다.)


 이 위원회는 1983년 새 성문법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법령의 권위보다 못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 원전(原典)들은 공의회 회원들이 무류성에 연계되지 않길 원했기 때문에 무류성이 없다. 그러므로 1983년 성문법은 홀로 무류성이 없다. (그러나 지속적인 법적 전통교회와 동질성이 있는 경우 무류성이 될 수 있다.) 만약 전체적으로 1983년 새 성문법이 무류성조차 없다면 그 밖의 다른 법령들은 무류성의 요구 여건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조사해 봐야할 필요가 있겠는가?


 교황 바오로 6세는 그의 미사를 강요하지 않았고 다만 허용했을 뿐이다. ‘허용된’ 것이라는 어휘조차 ‘Mussare Romanum' 법령에서 조차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는 겨우 말하기를 ..... 이 미사가 받아지길 그는 확신한다...... 여기에서 신부에게 부과되는 확실한 명령, 지휘나 계율이 없다. 성 비오 5세의 (영원불변의, 개정을 금지한) 확고한 명령과 이와 같은 연약한 언어와 비교했을 때, 어떻게 로마 교황의 무류성에 의해 둘 다 보호되기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새미사에 적극적인 이단의 요소가 없도록 교황이 보호할 수 있게끔 교회의 완전함과 성신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이다. 성 바오로가 안티옥에서 성 베드로를 책망에서 보듯이 위장(거짓)으로부터 보호 될 수 없었다. 성 토마스가 말하길 이는 신앙에 있어 추문(醜聞)이었던 것이다.


 그와 반대로 입증되지 않은 요구에도 불구하고 새미사는 전례성성(典禮聖省)에 따라 반포된 것이 아니다. 새미사에 부여한 전례성성의 교령은 Acta Apostolicae Sedis (교회를 관장하는 새로운 전례를 발표하는 공식적인 기관 – 편집자 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례성성의 교령(1964.4.6.일)은 새미사의 첫 초판에 있지 Acta Apostolicae Sedis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틀림없이 없다. 새미사의 나중 판에 나온 두 번째 교령 (1970.5.26.일)에 새미사를 단지 ‘허용’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첫째, 또는 두 번째 교령이 교황의 무류성에 의해 보호되어 있다고 말하는 살아있는 신학자는 아무도 없다. 기껏해야 교황의 열정적 교권에 포함될 따름인데 이는 무류성에 의해 보호되지 않는다. 로마 전통 교회의 순응 했다면 무류성이 될 수 있으나 이때도 역시 변혁을 도입할 때는 무류성이 되지 못한다.


 천주 흠숭 성성의 통고서에는 늙은 사제나 사제들에게 회중 없이 전통 미사를 제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까지 이 법령에서 사제가 전통 미사를 금지하거나 새미사만을 봉헌할 의무가 있다고 한 규정을 찾아 볼 수 없다. 1974년 10월 28일에 열린 같은 성성의 통고서에 있지 않다. 이 보고서는 Acta Apostolicae에 있지 않다. 더욱이 고위 성직자에 의해 인증 받은 바도 아니요, 이 또한 그 이전의 특권 매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성 비오 5세 교황의 특권이 준 것 , 사실 그와 같은 것이 은전이다.) 이 특전은 확실한 배척을 않고는 폐지될 리 없고 아직까지 이것이 결코 시행된 바는 없다. 누가 이와 같이 무류성의 보호 하에 있다고 주장 할 수 있는가?


 그 개혁안들은 혼돈된 신학뿐만 아니라 뒤엉킨 법의 제정으로 특성 지어져 있다. 이 점에 있어 성 교회에 대한 성신의 도우심을 면밀히 볼 줄 알아야 한다. 교황은 현대주의자들이 완벽한 법적효력으로써 그들의 개혁안을 온당하게 공표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교회 신학의 혼란을 다루는 적절한 학문이 있다. 어떤 사람은 새 교회법 제정의 혼란에 관하여 책을 써야만 한다고 하는데, 이 혼란을 야기한 많은 증거들이 이와 같은 법 제정에 대한 무류성에 포함되지 않도록 사람이 조절하는데 있어 확실히 충분할 것이다.


 새미사는 이렇게 많은 부족함과 특히 모든 사제들과 신앙인들에게 의무가 되어야 할 적절한 법률상의 언어조자 결핍을 드러낸 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선포되었다. 보편적 법률에 있어 이것이 교황의 무류성에 의해 보호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성무일도서에 관한 유사한 논쟁이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성영(시편)의 어느 한 페이지 특히 ‘저주의 시 구절’이 제거되길 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전례 시간 매주 150가지 성영을 포함하지 않고 통합하여, 한 달에 한 번도 포함되지 않는 것도 있으며 몇 장은 전혀 언급되어있지 않다. 이 시 구절에 불어넣은 성신의 오류인가?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들 시 구절을 부끄러워했는가? 여기서 다시 똑같은 독소가 있다.


 이와 같은 성무일도서를 사용한 독실한 신자와 사제들은 세상을 거부하는데 있어 이와 같은 작용으로 약해졌으며 새미사를 반대하는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새 성무일도서는 교황의 무류성에 의해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새 미사는 가톨릭의 ‘공식적’ 미사인가?

 

 ‘공식적’ 가톨릭 미사의 용어는 많이 쓰이나 모호하다. 미사로서 가톨릭교회 안에서 직위를 갖고 있는 사람에 의해 이 용어가 쓰인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현대의 새미사는 ‘공식적’ 가톨릭 미사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공식적 임무를 갖고 있는 사람에 의해 행해지거나 쓰이는 것 모든 것들이 가톨릭 원리에 일치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야만 한다.


 단순한 유사점이 그 질문에 답을 줄 것이다. 교회의 몇몇 고위 성직자조차 대죄에 빠진 것은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그렇다고 그들이 (신앙에 대한 두드러진 죄를 제외하지 않는 한) ‘교회 밖으로’ 추방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내 몇몇 가라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가라지가 가톨릭교회 내 공식적으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교회 안에 있는 것 모두가 교회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에 속했더라면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와 함께 남아있으리라 명백해진바 그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요한서 2:19)


 세상이 끝날 무렵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 내 모든 추문들은 드러낼 것이다. 현대의 새미사는 성 교회의 정신으로 영감된 것이 아니라 교회 일치 운동, 세상에 비위 맞추려는 열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리스도 정신과 모순되는 것이다, 성 바오로가 말씀하시길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친주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있더라면 나는 천주님의 종이 아니다”(갈라디아서 1:10) 새미사는 교회 내 몇몇 가라지처럼, 또는 범세계적으로 교회 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새미사는 본질적으로 나쁜가?


 위에서 설명한 구분에 의하지 않더라도 우위 접근법은 교황이 이를 선포했기 때문에 새미사는 그 자체‘나쁘거나’ ‘사악’ 한 것이 없다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자 여기서 몇 가지 심층적인 구분을 해보자. 악이란 좋은 것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탈은 인간의 언어로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표기될 수 있는바


1) 사람이 그가 말한 것을 믿지 않을 때이다. 우리의 말은 우리 생각과 일치 되어야만 한다. 이 일치가 실패한다면, 이것을 나쁜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2) 그 말이 생각과 일치하나 그 생각이 실제와 벗어날 때 이것이 신앙의 문제일 때는 이것을 오류 또는 이단의 악이라고 한다.
3) 우리가 반드시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을 때, 즉 악에 관해 말하지 않을 경우 악의 생략인데 믿음에 있어 신앙을 고백해야 할 때 신앙의 드러내놓고 하지 않는 것은 상황과 의무의 중요성에 따라 대죄가 될 수 있다.


 성사를 성전에 모셔야 하는 전례 의식은 영혼으로 하여금 모든 은총의 혜택을 받게끔 드러나 보이게 하고 우리를 경탄케는 천주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성사 예절로서 일어나는 가톨릭 신앙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공언해야 한다. 전례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교회 문답적인 가르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실천이며 이 모습은 개방되고 명확하며 숨겨져 있어서는 안 된다.


 거룩한 성사에 둘러싸인 성 교회와 함께하는 존경스럽고 경외스런 이들이 신앙의 실체이요, 모든 가르침보다는 더 나은 경우인데 이것이 믿음 있는 세대들에게 신앙을 가르쳤다. 전례 의식은 반드시 가톨릭 신앙을 드러내야 한다. 전례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성 교회는 각 시기마다 공격받는 성 교회의 전례적  진리를 함양시켜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진리가 공격당하면 당할수록 전례는 더욱 그 진리를 드러내야만 한다. 이 신앙의 표현의 조직적인 제거는 선의 이탈이다. 이런 사례가 가져다 준 것이 얼마나 큰 파괴인가 알아 차렸을 때는 큰 문제인 것이다. 진리를 나타내는 전례상의 표현이 새미사에서 전적으로 없어진 것은 아니다 라고 사람들은 생각할는지 모른다. 물론이다. 만약 진리가 전적으로 사라졌다면 더 큰 반대가 일어났을 것이다. 현대주의자를 자처하는 전례주의자들은 한층 교활하다. 그들은 몇 가지 표현이나 행위를 남겨놓고 많은 전례를 선택사항으로 만들었으며 애매모호한 해석이 되게끔 열어 놓았다. 이와 같은 결과로는 신앙을 드러내 보이는 데는 미흡하다 철저한 전례의 제거가 빠른 파괴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많은 생략은 지극히 해로우며 이단이 드러나 보이는 한 가지 행위 만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신덕(信德)을 잃게 하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록 고의적이라도 신앙 고백의 한 가지 생략은 죄가 될는지 모르지만 이것만으로 사람이 신덕도리를 잃게 하는데 부족하다. 그러나 그 문을 열어놓고 그쪽으로 휩쓸리게끔 무의식적으로 신앙을 약화시킨다.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표현은 극도로 강한 표현이나 더 나쁜 적극적인 이단에 비해 신앙의 고백을 빼버리는 덜 나쁜 점에 있어 ‘그 자체 나쁜’이라는 표현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략이 새미사 자체나 라틴 원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새 미사의 나쁜 점이 신앙표현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몇몇 사제들은 빠진 것을 대신하여 개인적으로 강한 신앙고백과 깊은 봉헌, 강론이나 로사리오(묵주) 기도, 성심 봉헌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수단들은 그들 교구민들에게 확실히 도움이 되며 이 사제들이 죄를 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새미사가 현대주의자들이 널리 영혼을 황폐시키는 커다란 수단이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남기고 있다. 세상과 타협을 반영하는 새미사의 전례상 표현이 없다면 오늘날의 위기도 없다. 새 미사를 받아 드리는 것은 성 교회의 적들에게 저항하지 않으려는 명백한 증거이다. 얼마나 많은 “선한 사제들”이 아직도 손으로 영성체하는 것을 거절하는가? 이것이 단지 신중한 질문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신중한 덕은 우리의 신앙을 감소시키는 요인을 허용하지 않도록 요구한다. 만약 새미사를 받아드림으로써 타협을 시작한다면 결과적으로 영혼에 큰 해를 주는 이 타협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 ‘선한 사제들’ 은 오늘날 아직도 여자가 제대에 서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십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가? 절대적으로 전통미사에 남아있는 것을 선택사항이 아닌 것이다. 변혁주의자들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전통 미사를 고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택 사항’으로서 또는 ‘개인의 카리스마’나 ‘새미사의 완전한 적법함’을 고려하면서 전통 미사를 지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통미사는 가톨릭 신앙을 온전히 표현하며 구원에 필요한 그 신앙을 선택 사항으로 나타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새미사는 교회 일치를 위한 신앙을 증가시키는 새로운 신앙을 만들어낸다. 부정을 희석시킴으로써 교리가 부정과 혼돈으로 가는 세상을 공격할 아무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람은 가톨릭 신앙을 선택상의 수준이나 개인의 권위급으로 격하시켜서는 안 된다. 현대주의자들은 우리가 자기들의 새미사를 받아드리지 않자, 우리가 전통미사에 고수(固守)하는 것을 단지 개인의 선택사항의 수준으로 낮추었다. 성비오 10세회는 이것을 거절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거절할 것이다.


 새 미사는 주일을 지키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명령이 포함되어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천주님의 세 번째 계명은 주일 희생을 포함하고 교회의 계명은 미사참여를 명하는 바 이는 주일 날 희생 바치는 구체적인 수단인 것이다.


 교회에 권위를 갖고 있는 교황이 교회의 계명을 변화 시킬지라도 천주님의 계명을 변화시킬 권력은 없다. 토요일에 이루어지는 주일 미사(토요특전미사)의 예를 들어보자. 교황은 토요일 저녁 미사가 교회의 계명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말할 권한이 있다고 하나 천주님의 계명은 주일날에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교황이 무엇을 했던 간에 「주의 날」을 일요일에서 토요일로 변화시킬 수 없다.


 이에 관련하여 말하기를 “이 특권의 목적은 오늘날 가톨릭인들이 주님의 부활의 날을 보다 쉽게 축하하는 사실이 있다.”라고 한다. 정직해지자. 토요일 저녁 때 주일 특전미사를 치루며 그 전날 교회의 계명을 충족시킨 후 천주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다시 일요일 날 미사를 행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이와 같은 특권이 주의 날을 희생해야하는 천주님의 계명을 많은 영혼들이 까맣게 잃어버리는 것을 알 사람이 있겠는가? 다시 말하자면 여기 한 법률, 영혼에 해악을 끼치지만 무류성에 보호되지 않는, 즉 의무가 아닌 단지 허용되었을 뿐인 법률을 갖고 있을 뿐이다. 새미사는 주일 성수 의무를 만족시키는가? 교회 계명에 관한 한 만족시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법의 목적은 천주님의 계명을 이행하는 주의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직적인 빠트림으로 인하여 신앙을 약화 시키는 전례의식, 새 에큐메니칼 정신은 온전히 천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 모임이 새로운 방향의 중심이 되고 선전된, 그리고 너무나 많은 영혼들이 종교적 생활과 신앙을 버리는 배교자의 길로 이끄는 이 의식이 어떻게 ‘주의 날’을 거룩하게 하겠는가?


 만약 우리가 객관적 접근법을 받아드리고 여러 정황과 증거의 실체를 개방적으로 인정한다면 그 대답이 부정될 리는 없다. 새미사가 천주님의 계명을 거룩하게 한다고 지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미사 의식의 도움을 통하여서라기보다 개인의 희생과 헌신을 바치는 많은 사람들이 주의 날을 거룩하게 하지만 그들은 새 미사 의식의 정신에 거슬러 싸워야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는 거리가 매우 멀어 매 주일 전통 미사에 참석 못하는 몇몇 가정, 특히 아이들이, 새미사에 가는 것보다 (주일마다 전통 미사를 못 가질 때) 가정에서 주일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말씀하신 르페브르 대주교님의 지혜로운 충고를 보아왔다.
 
 결론: 충성


 필요한 구별 없이 우위 접근법을 추구할 때 사람으로 하여금 객관적 접근법에서 벗어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결론에 이르는 믿음과 실생활로 이끌게 된다. 두 접근법은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 나는 혼란의 결과를 초래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전통미사의 유명한 옹호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 법적으로 유효한 교황의 입법 사실이 도덕적으로 합당하지 않을는지 모른다는 사실은..... 교황의 무류성에 의해 보호받는 것이 도덕적으로 합당치 않은가? 객관적 접근법을 이와 같은 진술이 허용되지 않는다.


 행위의 중요성을 회상해보자. 실제 새미사가 허용된 거의 모든 곳에서 전통에 충실한 곳을 빼고 현재 권위의 위기가 나타나는 바, 전통 미사 드리는 것이 (불법적으로) 거절된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상태에 따라 해야 할 것을 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만약 한 지방의 사제와 레위인이 부상당한 영혼을 보고 지나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사마리안 사람처럼 낯선 사람이 멈춰서 그 영혼을 돌봐주는 것은 적법하다. 사마리아인은 지방 사제로부터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현대주의자들은 교회 고위직에 자신들이 앉아서, 전통을 옹호하고 널리 퍼뜨리려는 충실하고 선한 사제들의 많은 노력을 훼방하는데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한다.


 1970년대 초기 그들의 새미사가 만장일치로 채택되리라고 생각했으나 몇몇 저항하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1974년의 ‘공시문’을 내고 새미사를 강요하였다. (이 공시문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저항하는 이들을 박해함에도 불구하고 전통 미사를 요구하는 소리가 성비오10세회 내에서 점차 강하고 성장해나가자 그들은 받아드릴 수 없는 대가를 압박하면서 “특전” 방해하였다. 그들은 말하길 “여러분은 새미사와 공의회의 적법성을 인식하며 르페브르 대주교를 비난하고 옛 미사를 받아드려도 된다.” 규정 (새미사에서는 아직도 특전)에 대한 예외 (특전)로써 그에 못한 상황에서 전통 미사를 받아 드리는 것은 모호성과 새미사의 변혁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부당한 적법성을 주게 되는 꼴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진리와 전통미사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다. 진리와 선은 오류와 악뿐만 아니라 비난을 거절할 때 충분히 고양되는 것은 아니다. 영세 때 우리에게 가르친 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믿는 것을 세 번씩 공언할 뿐만 아니라 악마의 기만과 그의 일을 세 번씩 끊어내야 하는 것이다.


 성 교회는 우리 주님의 정배(定配)이다. 그분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교회가 이 위기를 견디도록 허락하신다. 오랜 세월동안 선한 교황들에게 의해 교회가 줘왔던 빛이 최근의 후계자 교황들에 의해 희석되어 혼란에 처해있다. 가르침을 고수하고 전통 안에서 성 교회의 실생활과 주님께 충성으로 남아있도록 하자. 교회와 주님의 종으로 성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바치는 최상의 효성인 것이다. 이에 관해 주님이 말씀하시길 : “시몬아, 사탄이 밑을 까브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고자하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 하였다. 그러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세게 하라(루카22:31.32)”


 성모님, 가장 충실하셨던 성교회의 어머니께서 우리가 회개의 충성의 은총으로써 교회의 모든 일원으로 남게끔 지켜 주십사 하고 기도드립시다.